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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그 때는 내가 뭘 몰랐어요 !

비로소,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by 나무Y

오래 전에 대학으로 옮긴 선배 한분을 운동 모임에서 다시 만났다.


그러니까 벌써 삼십여년이 훌쩍 흘렀다.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같은 층에 근무했기에, 그분의 일하는 모습을 보거나, 종종 회의를 같이 하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에 그분은 뭐랄까 일에 대해 치열함이랄까 진정성이랄까 뭐 그런게 없어 보였다. 일테면, 회의 시간에 기술적 문제를 토론할 때, 보통의 연구원인 우리들이, 자기 주장을 하느라 목소리를 높이고, 때로 열받아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갑론을박 시끌 시끌할 때, 그 분은 한발짝 떨어져 실없는 농담을 툭툭 던지곤 했다. 그러면 여기 저기 킥킥 웃음이 번지며, 무언가 압력이 가득차 있던 회의실은 피시식 바람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복도를 오고 갈 때면, 커피 자판기 앞에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떠는 무리 속에 그 선배가 단골 멤버로 끼여 있는 것을 자주 보기도 했다. 그 선배가 끼어 있던 그 무리들은 제법 유쾌한 분위기여서, 내심 지난 밤 술자리 이야기를 하나, 또 무슨 실없는 농담을 하고 있나 싶었다. 말하자면 일 이야기를 하는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 당시, 제법 착실한 모범생으로 학교를 마치고, 입사한 지 얼마 안된 애송이 연구원이었던 나는, 쥐뿔도 모르면서 그저 진지한 열망에 사로 잡혀 있었다. '나는 연구원이예요'라고 얼굴에 써붙이고, 앉으나 서나 심각한 얼굴로 일 이야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내 눈에 그 선배는 엉터리 연구원으로 보였다.


얼마 안 있어, 그 선배가 제법 괜찮은 대학으로 옮긴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엥, 저런 허허실실 연구원이 대학교수가 된다고라... 그리고는 그 선배를 잊었다.


운동모임에서 다시 만난 선배는 은퇴를 앞둔 교수로서 보기 좋게 나이가 들어 있었다. 함께 라운딩을 하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툭툭 던지는 모습에 문득 옛날 옛적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이 양반이... 아직도... 그런데 말이다. 가만히 보아하니, 무심한 듯,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을 은근슬쩍 잘 챙기신다. 분위기가 좀 가라앉는다 싶으면 슬쩍 슬쩍 농담을 던져 사람들을 실실 웃게 만들어 주어, 분위기가 가볍고 유쾌해 진다. 게다가 볼도 수준급으로 치신다. 아니... 학생들은 안 가르치고, 볼만 치고 다니셨나.. 하다가 아차차 싶었다.


사실 그 선배가 학자로서, 교수로서 어떤 성과를 냈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선배들끼리 나누는 제자들 이야기나 학회 에피소드 등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적어도 밥값은 제대로 하며 사신 듯 하다. 무엇보다 사람을 챙기며 살아 온 듯 하다. 나는 어떤가? 전전긍긍하며 열심히 살아, 겨우 밥값은 한 듯 하다. 그 밥값 하느라 인상깨나 쓰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와 주변을, 꽤나 피곤하게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쥐뿔도 모르면서, 일을 열심히 하네, 안하네 시건방을 떤 것이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니, 비로소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사람들이 점점 좋아지고, 또 닮고 싶어진다. 타고 난 내 손바닥만한 마음 밭으로 사람을 얼마나 품을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노력할 일이다.


아무튼...

‘선배 그 때는 미안했어요 ! 내 속알머리가 밴댕이 속이라 사람을 몰라 보고, 시건방을 떨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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