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연연, 전문가 중심 시대를 열어 명실상부한 연구 집단으로 나아가기를
조만간 닥칠 일이건만, 어쩐지 나한테는 결코 닥치지 않을 것 같았던 은퇴가, 두둥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몇일 전, 드디어 퇴직절차와 서류에 대한 안내 메일을 받고 보니, 비로소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34년 2개월, 살아온 인생의 반 이상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러니, 직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상은 내몸에 체화되어, 직장과 분리된 삶을 생각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곳을 떠난 후의 내 일상은 어떻게 펼쳐질까? 솔직히 기대되는 마음 못지 않게 막막한 마음도 불쑥 올라 온다.
오락 가락하는 마음을 다독이며 퇴직 서류를 준비하는 중, 내친 김에 내가 남긴 흔적들을 정리하다 보니, 논문, 국내외 등록 특허, 기술이전, 연구보고서 등 적지 않은 자료들이 검색된다. 흠흠... 양이 아니라 질이 문제이겠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그 10년이 3번이나 지나가는 세월을 정부출연연구소의 연구자로서 살아왔다. 허허벌판 논밭이었던 둔산은 고층빌딩이 빽빽이 들어서 상전벽해를 실제로 이루었고(아... 그때 밭 한떼기라도 사두었더라면...), 존재감없던 나무들이 자라 연구단지 운동장은 푸른 숲을 이루었다. 뭣도 모르던 연구원도 열심히 배우고, 재미있게 일하고, 속절없이 무르 익었다. 꼽아보니 연구개발 실무자로 약 17년(초기 및 말기), 사업책임자로 약 15년(2000년 이후), 크고 작은 부서의 보직자로 약 17년(2000년 이후), 그렇게 세가지 정체성으로 살아왔다. 떠날 때가 되니, 걸어온 지난 흔적을 살펴보며, '무엇이 중헌디?' 라는 성찰적 회고를 해보게 된다.
연구개발 실무자로서의 나의 시간은 말하자면 '워라밸'을 누리며, 비교적 만족도가 높은 삶을 살았다. IT 분야 산업의 성장기라는 좋은 운 때와 초기 정부출연연구소의 사회적 위상 덕에, 귀한 대접을 받은 셈이다. 대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첨단 통신시스템을 개발하고, 이를 사업자망에 직접 적용하는 등 뛰어난 선배들에게 일을 배우며 즐겁게 일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머리 속에서는 자주 프로그램이 돌아갔고, 얼른 출근해서 결과를 확인하고 싶던 날들이었다. 밖에 나가면, 내 소속을 밝히는 것에 당당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연구개발자로서의 10여년이 지난 후, 비교적 이른 나이에 보직을 맡게 되면서 연구개발 실무에서 손을 떼게 되었으니, 2000년 이후 부터는 줄곧 과제책임자 혹은 연구부서를 맡아 온 셈이다. 보직자나 과제책임자로서의 삶은 살짝 무거웠다. 예산 확보하는 문제로 자주 전전긍긍했고, 항상 해야할 숙제가 있었고, 해가 바뀌면 되풀이 되는 과정을 성실하게 반복했다. 정부와 연구관리 조직이 요구하는 잣대에 맞추어, 성과를 만들고, 말을 다듬는데 에너지를 쏟았다. '보람'이나 '재미'라는 단어 보다는 '책임감'이나 '해야 한다' 라는 단어를 더 자주 쓰게 되었다. 어렵다 어렵다 하면서도, 사람은 늘어났고, 조직은 커졌다.
나의 34년 2개월을 몇줄로 요약해 보자면,
"저는요. 이런 저런 부서의 부서장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일했고요. 이런 저런 과제의 책임자로 사업을 이끌어 이런 저런 성과를 냈어요. 그리고, 어린 연구원이었을 때는, 이런 저런 시스템을 개발해서, 통신사업자망에 적용하기도 했어요." 말하자면, 내가 맡았던 보직자로서의 역할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과제책임자, 연구원의 순서로 나의 지난 삶을 정리하게 된다.
그런데, 출연연구소라는 내 직장의 국가사회적 역할과 연구자라는 직업적 삶의 본질을 고려할 때, 나에게 맡거진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연구 조직이 성과를 만들어내고, 그 성과의 축적을 통해 우수한 전문가 집단으로 발전해 가는데 있어서, 그 키를 잡고 방향을 선도하는 대표 연구자는 사실 과제책임자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의 내 직장의 문화는 과제책임자보다 보직자가 우선하는 것 같다. 연구소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문화가 대체로 그러하고, 연구 현장에서의 많은 의사 결정 과정이 그러하다. 아마도 한국 사회가 보직자 중심의 수직적 권위주의 문화가 강하고, 연구소라는 내 직장도 예외없이 이런 문화에 익숙해서 일 것이다. 나 역시, 과제책임자로서의 역할 보다는 보직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에 더 의미를 두고 살아왔다. 그러나, 떠날 때가 되어, "자, 군더더기는 떼어내고 본질을 찾아보자" 생각하니 "뭣이 중헌디?"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 세대는 출연연이 민간 산업을 기술적으로 선도하며, 기능과 규모가 급속히 커지는 양적 발전의 시대를 살아 온 셈이다. 그동안, 민간의 기술력이 출연연 못지 않게 발전하였고, 이제 출연연은 민간의 기술혁신을 지원할 수 있는 진정한 전문가 집단으로의 질적 발전을 이루어내야만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지금의 출연연이 우수한 전문가 집단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적자원 확보, 혁신적 원천연구에 대한 안정적 투자, 연구자율성 확보를 위한 연구관리 행정 혁신 등 연구개발 시스템 전반에 대한 논의와 재정비가 물론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연구현장의 가치관과 문화를 보직자 중심의 관리형 조직에서 전문가 중심의 조직 문화로 바꾸는 것이 정말 중요하지 않나 싶다.
연구소를 대표하는 사람은, 주요 기술을 이끄는 대표연구자가 되어야 하고, 연구현장의 의사결정은 주요 과제책임자들에게 권한이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보직자는 연구조직의 관리자로서 과제책임자들이 성과를 잘 만들어내도록 지원하는 역할이어야 하지 않을까?
출연연의 뿌리에 해당되는 과제책임자는 깊이있는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기획부터 수행까지의 전단계를 과제원들을 이끌며 의미있는 성과를 만들어 내고 축적해 가는 핵심 인재로서, 전문지식과 연구 역량, 리더쉽을 필요로 한다. 앞으로, 능력있는 연구자들을 과제책임자로 발탁하고, 연구 현장에서의 과제책임자의 권한을 강화시켜주고, 과제책임자의 역할과 성장을 교육을 통해 지원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역량있는 과제책임자들이 대내외적으로 전문가 리더쉽을 발휘하며 우수한 성과를 축적해 나가고, 출연연의 대표 연구자로 성장하며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키워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떠날 때는 말없이 가라 했지만, 우리 서로 열심히 사랑하며 한 세월을 살았기에… 보따리를 싸면서도 주절 주절 말을 남긴다. 모쪼록 관리의 보직자 중심 시대를 마감하고, 전문가 중심 시대를 열어 명실상부한 연구 집단으로 나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