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설주의보를 뚫고 날아간 파타야
대설주의보를 뚫고 날아간 12월의 남국, 파아란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타이만에서 훈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태국 국왕 소유라는 파타야 D 호텔에는 여름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바닷가를 면한 수영장에서 아이들 처럼 놀았다. 햇빛이 뜨거워지면 선베드에 누워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해산물 튀김에 싱하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싱겁기 짝이 없었는데, 썬 파라솔 그늘 속에 앉아 마시기에 오히려 좋았다. 수영장물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고, 동서양의 어른 아이들이 첨벙대다 다시 선베드나 카바나로 돌아가 빈둥대는 모습은 평화로웠다.
심심하면 호텔 위쪽 수영장으로 올라가 탁 트인 타이만 바다를 바라보며 산책을 했다. 바람은 건조했고, 비릿한 바다 냄새를 품고 있지 않았다. 마치 어느 산에서라도 불어 오는 듯…
하루는 수영장 옆 커다란 반얀트리 나무그늘에 누워 한나절을 보냈다. 먼 바다에 배들이 점점이 떠 있고, 그 하늘에 패러 글라이딩이 새떼 처럼 아득히 떠 있었다. 청춘은 바다 저편의 하늘을 날고, 나는 한가로운 풍경 속에 누워 내 지나간 청춘을 잠깐 생각했다. 뭉게 구름이 흩어지듯, 내 청춘도 순식간에 흩어져 흐릿해 졌다.
오후가 되어 햇빛이 더 뜨거워지면, 호텔 바깥으로 딸아이와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마치 우리나라 원두막 처럼 생긴 태국의 전통가옥이 쭉 늘어선 스파에 들어가니 이국의 향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이국의 여인은 정성스레 내 몸을 만져 주었다. 여인은 몸집이 자그마했으나 힘이 좋았다. 얼핏 내 나이 또래로 보이지만, 아마도 나보다는 휠씬 젊을 것이다. 어쩌다 이 여인은 낯선이의 몸을 풀어주고, 나는 또 어쩌다 이 여인네의 손길을 받게 되었을까... 쓸데없는 상념도 나를 따라 여행을 온게다. 마침내 마사지가 끝나, 방을 나서는데 두 손 모아 인사를 전하는 여인의 깡마른 갈색 얼굴이 석양 햇빛에 반짝였다. 그 눈이 맑다. 공손히 모아쥔 두손 마디가 굵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고개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컵쿤 카...
늦은 오후에 호텔을 나서 동네 식당을 찾아 갔다. 호텔 밖 거리는 놀랄만큼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낡은 차와 오토바이, 사람들이 뒤엉켜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좁고 울퉁 불퉁한 인도를 걸어 가노라면, 망고나 파인애플, 길거리 음식 같은 것을 파는 낡은 수레가 있고, 결코 바빠 보이지 않은 사람들이 그 곁을 스쳐 지나갔다. 몸에 딱 붙은 빨간 원피스를 입은 어린 여자들이 삼삼오오 서있는 요란한 골목길도 지나쳤다. 신호등이 거의 없어서, 눈치껏 길거리를 후다닷 이쪽 저쪽으로 건너다니다 보니 반쯤 넋이 빠져 나가는 듯 했다.그렇게 딸이 점찍은 ‘재스민 카페’라는 소박한 식당에찾아가 저녁을 먹었다. 우리 세 식구가 앉으니 무릎이 닿는 작은 식탁에 올라온 긴 이름의 음식들은 맛있고 만족스러웠다. 우리 테이블 건너편에는 이쁘게 화장을 한 레이디보이가 웬 늙수구레한 백인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다음날 일찍 파타야를 떠난 방콕으로 떠나왔다. 여행하기에 참 좋은 날씨라는 내 말에 택시 기사는 "Only this month" 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어느새 남편과 딸 아이는 잠이 들어 고개를 떨구고 있다. 창밖으로 스치는 타이의 여름 들판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래 전 한국의 여름 시골길을 달리는 듯한 기시감이랄까.
문득, 12월이 아닌 달, 습한 공기와 뜨거운 태양과 친절하지 않은 바다 바람이 부는 대부분의 시간의 파타야의 거리를 떠올려 보았다. 다른 계절에도 그 거리에는 차와 사람들이 뒤엉켜 북적이며 굴러가고 있을 것이다. 물질 문명의 세상에서 건너간 내 눈에 호텔 바깥의 그 곳은 버려진 듯 낙후되어 보였다. 온갖 시설들이 낡고 낙후되었지만, 인간이 만든 쓰레기는 거의 보이지 않던 거리 … 잠깐 내 마음이 바빴다. 거리 마다 신호등을 세우고, 보도블럭을 정비하고, 길을 막던 가로수들을 짤라 내고, 시도 때도 없이 울려 대는 경적 소리는 규제하고...
그러나… 그렇다면 그 곳이 환락과 휴식의 도시 파타야일 것인가? 통제되지 않아 효율이나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지만, 혼돈 속에서도 그럭저럭 흘러가는 자유로운 세상… 나는 내 생각을 멈추었다.
파타야와 방콕의 몇일을 거쳐 나는 다시 나의 계절로 돌아왔다.이른 새벽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맵고 칼칼한 순두부 찌게를 들이켰다. 여름으로 넘어갈 때 순식간에 익숙해 진 것처럼, 겨울로 돌아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뭉게 구름이 떠있던 파아란 하늘과 뜨거운 태양, 타이만에서 불어오던 훈풍, 바닷가의 커다란 반얀트리 나무... 내 뭉친 어깨를 힘껏 풀어주던 까무잡잡한 여인, 나를 보며 수줍은 듯 웃어 주던 레이디 보이.... 12월의 짧았던 여름이 꿈꾼 듯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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