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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Y Jan 26. 2023

설거지 담당, 철들다!

- 그 시냇물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 시댁은  마을 앞으로는 달창 저수지를 안고 있고, 마을 뒤쪽으로는 비슬산 지산이 솟아 있는 현풍 근처의 조그마한 마을이다. 어느덧 아버님 대의 어르신들은 대부분 돌아가시고, 시어머님과 사촌 형님들이 이웃하여, 퇴락해 가는 마을을 지키며 살고 계신다. 명절에는 사촌 형제들이 모두 모여 제일 큰집부터 시작해서 차례차례 내려오며 제사를 지낸다. 그러다 보면 삼 형제 중 막내이신 우리 시아버님의 차례상은  10시를 넘겨 지내곤 한다. 그런데 지난 3년여, 명절이 되어도 서로 오고 가지 않고 각자 명절 차례를 지내 왔다. 오고 가지 않으니, 추석이나 설이 싱겁기는 했지만, 음식상을 차리고 치워야 하는 여자들 입장에서는 솔직히 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설에는 다시 집안이 모여 차례상을 함께 모셨다. 전날 제사 음식을 미리 장만해 둔 손위 동서와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제사상을 차려 두었으나, 11시를 넘겨도 온다 간다 소식이 없다. 산 사람도 배가 고프지만, 아버님도 차례상 기다리시다 배가 고프셨을 듯. 오랜만에 만난 사촌들이 할 이야기가 많았는지, 11시도 훌쩍 넘겨서야, 제사를 모실 수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사촌 형제들과 조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가 우르르 빠져나간 후, 떡국으로 늦은 아침을 먹고 나니 거의 정오가 다 되었다.


    늘 그렇듯이 손위 동서가 차례상을 치우며, 음식들을 갈무리하고, 나는 주방 개수대 앞에 자리 잡았다. 떡국 제사라 설거지 거리가 많지 않아 다행이지만,  시골집 좁은 부엌의 명절 설거지가 만만치는 않다. 이럴 때는 무념무상 자동 설거지 모드를 장착하여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는 게 최선이다. 그런데, 구순을 훌쩍 넘긴 시어머니께서 당신이 직접 설거지를 하시겠다고! 밀고 당기고 하다가, 이제 더 힘이 세진 며느리가 개수대를 차지했다. 시어머니는 씻은 그릇들을 바로 닦아서 갈무리하시려고 마른행주를 들고 옆에서 대기 중. 며느리는 설거지 장인이 되어, 수북이 쌓인 스테인리스 그릇들과 접시, 수저를 세제로 닦고, 흐르는 물에 헹구어 어머니께 넘겨 드린다.


    막내며느리는 늘 설거지 담당이었다.  젊은 막내며느리가 개수대를 차지하면, 싱크대는 양껏 풀어놓은 세제와 최대로 틀어놓은 수도꼭지로 난리가 아니었다. 덕분에 그릇들은 거품 목욕과 뜨거운 폭포수 샤워를 씨~원하게 맞았다. 싱크대 주위로 거품이 튀고, 바닥으로 물이 흥건히 흘러내리고. 그러면 낡아서 빛을 잃은 그릇과 수저들이 좀 깨끗해지는 듯하여 막내며느리는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유난을 떠는 며느리를,  시어머니께서는 “이까짓 거 내가 후딱 치우면 되니, 집에 올라갈 채비나 하라”며 자꾸 방으로 쫓아 내셨다. 어쩌다 한 번씩 주방 싱크대가 시어머니께로 넘어갈 때, 시어머니는 세제는 쓰는 동 마는 동, 쫄쫄 흐르는 수돗물로 그릇을 헹구셨는데, 나는 그것이 불편하여 애써 외면하거나, 눈치껏 그릇을 새로 헹구어 사용하고는 했다.


    그렇게 기백 넘치게 설거지를 해대던 며느리가, 어느 때부터인가, 세제를 쓰는 동 마는 동 하고, 수돗물도 졸졸 흘리며, 시어머니처럼 살곰 살곰 그릇을 닦게 되었다.




    어렸을 적 우리 가족이 살았던 경상도 성주 시골 마을 앞에는 사계절 내내 맑은 물이 흐르던 큰 내가 있었다. 어쩐 일인지 내 유년의 기억은 대체로 빈약하기만 한데, 그나마의 대부분 추억들은 그 냇가에 닿아있다.


    지금도 눈을 감고 가만히 떠올려 보면 나는 그 냇가의 풍경을 하나하나 그려낼 수 있다. 수량이 풍부해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던 넓은 하천, 그 어디쯤에 동글동글한 자갈들이 쌓인 비교적 얕은 물속 길이 있어서, 우리는 그 자갈길을 따라 냇가를 이쪽저쪽으로 건너고는 했다. 거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깊고 어두운 소가 있었다. 깊은 소는 낭떠러지로 이어지고, 그 위에 신작로가 휘이 돌아가고 있던. 언젠가 그 신작로에 올라가 내려다보았더니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물속에 누워있던 엄청나게 큰 바위에 갑자기 무섬증이 확 일기도 했다.


    물속 자갈길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잡초들이 자라는 작은 모래밭을 사이에 두고,  물길이 갈라져 작은 시내가 흘렀다. 그 작은 시내는 깊은 데가 일곱여덟 살짜리 아이의 배꼽쯤 왔을까?  고운 모래밭 위로 맑은 물이 천천히 흘러, 어린 우리들이 놀기에는 맞춤했다.  여름 오후의 햇빛이 어른대면 물은 반짝이며 춤을 추는 듯하고,  우리는 물속에 머리를 박고 모래밭에 펼쳐지는 빛의 춤을 구경했다. 그 어디쯤에는 물속에서 퐁퐁 물이 솟아나는 작은 구멍도 있어서, 우리는 작은 발꼬락으로 샘구멍을 막으며, 흩어지는 모래를 구경하고는  했다.


    물놀이를 하다가 배가 고파질 때쯤, 저 멀리,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버스가 신작로에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 가면 설명할 수 없는 낯선 감정에 휩싸여 갑자기 낯선 세상에 놓인 듯 의심스러운 세상을 둘러보기도 했다. 석양에 반짝이며 흐르는 냇물, 냇가 여기저기 버드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그 위로 펼쳐져 있던 파란 하늘, 그리고 그 너머 저 멀리 보이는 마을과 한없이 멀어 보이던  집으로 가는 길...




     몇 해 전, 내 마음속 고향인 시골 마을을 우연히 들르게 되었다.  이제는 널찍한 시멘트 다리가 놓인 그 냇가를 차를 타고 건너다 잠깐 내려서 둘러보았다. 가끔씩 꿈에서 찾아오던 그 냇가에 이제는 더 이상 맑은 물이 흐르지 않았다. 물도 확 줄어들어, 고여 있는지 흐르는지 분간이 어려운 데, 버려진 땅처럼 황폐해 보이는 냇가 여기저기에 키 큰 잡초들이 무리 지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부리나케 그곳을 떠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어머니의 좁은 주방에서 헛똑똑이 며느리가 낡은 그릇을 살곰 살곰 닦아 넘기면, 구순의 늙은 시어머니는 말없이 마른행주로 물기를 훔쳐 갈무리를 하신다. 결코 젊지 않은 며느리는 아주 늦게 철이 들고 있는 중이다.  


    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해 보게 된다. 내 아이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사진출처: pixaboy>


#명절 #설거지 #환경오염 #시냇가  #며느리 #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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