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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냄새

by 남예지

꽤 늦은 나이까지 싼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믿는 척 부모님을 속였다.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받고 싶은 선물을 편지지에 고이 적어 머리맡에 놓고 잠들었다. 물론 선물을 결정하고 쪽지를 쓰기 전, 엄마와 상의를 하는 과정은 필수였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어렸을 당시의 엄마 앞에서, 영특한 어린이는 나름대로 부모의 경제적 사정을 감안(?)하여 인형의 집이나 롤러 브레이드, 게임기 따위의 선택지를 읊는다. 엄마는 재빨리 이런저런 계산 후에 그 중 하나를 제안하고, 나는 이미 그 선물을 손에 쥔 듯한 흡족한 마음으로 싼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아침이 되어 싼타가 가져간 것으로 합의된 사라진 쪽지는 아빠의 손에 쥐어지고, 아빠는 퇴근길의 피곤함도 잊은 채 설레는 마음으로(지금에서야 생각나는 것이지만, 아마도 12월 달 월급 중 생활비와 보험, 저축 등등이 저울질되는 마음도 함께) 선물을 사와 좁은 집 어딘가에 꽁꽁 숨겨둔다.


그리고 대망의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 베란다에 있는 분홍색 코끼리가 그려진 서랍 위에 나와 동생의 선물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셨으리라.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어 베란다 문을 힘차게 열고 달려나갈 때, 아직 여물지 않은 발바닥에 닿는 그 매끈하고 차가운 타일의 감촉과 새벽의 찬 공기와 오래 쌓아둔 짐들 사이에서 나는 시간의 냄새가 어우러져 풍겨나오는 뭐라 말로 설명하긴 힘든 그런 공감각적인 느낌을 나는 '크리스마스 냄새'라고 불렀다.


부모님과 내 인생의 크리스마스 행사가 모두 끝나버렸을 무렵, 익숙한 그 냄새를 크리스마스 아침의 베란다가 아닌 곳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슈퍼마켓에 있는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는 커다란 냉동고였다. 우연히 깊숙하게 자리잡은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기위해 몸을 냉동고 속으로 한껏 밀어 넣은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바로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던 것은 아니다. 몇날 몇일을 고민했던 것 같다. 비로소 그것이 크리스마스날 아침의 그것이란 걸 알았을 때, 시각적인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재현되는 기억에 대한 놀라움이란! 그 이후로 슈퍼마켓의 냉동고를 보면 으레 머리를 한번씩 집어 넣었고, 그러면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날 아침의 베란다로 돌아가곤 했다. 20대 중반까지도 '슈퍼마켓의 냉동고 안에 머리 넣기'는 열렬한 내 취미생활이자 타임슬립의 도구였다.


아직도 가끔은 재미삼아 머리를 넣어보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이제 더 이상 그 곳에 크리스마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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