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무대 공포를 안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무대에 서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어떤 공포도 그 정도로 노출이 반복되었으면 나아질 법도 한데, 그 양이 조금 달라질 뿐 나의 무대에는 늘 공포가 함께 했다. 막 데뷔했을 무렵에는 그것이 무대 공포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그저 모든 게 두려운 아이였으니까(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2003년의 데뷔무대가 무려 당시 김광민씨와 이현우씨가 진행하던 '수요예술무대'였는데, 어떻게 그 무대를 그럭저럭 넘겼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나는 것은 단 하나, 마이크를 든 오른손이 너무 떨려서 왼손으로 그 손을 잡고 노래했었다는 것 뿐.
내가 무대 공포를 극복하는 법은 딱 하나였다. 전혀 공포스럽지 않은 듯 연기하기. 그래서 나의 연기력은 점점 향상되었고, 친한 친구들 마저도 내가 무대에서 떨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재즈 클럽 연주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라 연주자들이 중간에 자연스럽게 물을 마시기도 하는데, 난 물을 마시기 위해 컵을 드는 내 손이 떨리는 것을 보면 연기로 애써 붙들고 있던 나의 공포가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아 물도 제대로 못 마셨다.
남들은 나이가 들면 좀 나아진다고들 하던데, 난 웬걸 점점 더 심해져서 서른살이 넘어서는 급기야 음악에 집중이 제대로 안되기 시작했다. 특히 가사를 자주 잊어버렸다. 몇년 동안 불러서 익숙해진 가사도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내가 가사를 다 외우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이 불쑥 찾아오면 어김없이 흔들리고 머릿속은 캄캄해졌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가리기 시작했다. 이런 내 모습을 알고 있고, 혹시라도 내가 충격적인 실수를 하더라도 그냥 웃어 넘겨줄 수 있는 사람과의 연주만을 원했다. 클럽 연주를 위주로 이루어지는 재즈씬에는 '긱(gig)'이나 '잼(jam)' 형태의 연주가 많기 때문에, 생전 처음보는 사람과 사전 리허설 없이 악보하나만 가지고 무대에 오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상황은 나에겐 그야말로 쥐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관계가 좁아졌고, 점점 더 사람들이 두려워졌다. 나를 겁쟁이로 생각하면 어떡하지, 저게 무슨 재즈뮤지션이야 하고 생각하면?
특히 석사논문을 쓸 즈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연주를 거의 놓고 있었다. 논문은 항상 좋은 핑계거리였다(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지금도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행운아(?)인 것은 계속해서 누군가는 나를 찾아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나를 찾아준 한 뮤지션이(잘 알고 있었지만 연주는 처음 해보는 사이였다) 여전히 무대가 두려운 내게 해줬던 '넌 혼자가 아니야'란 말 한 마디가 마치 긴 긴 터널의 한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그래, 난 무대에서 단 한 순간도 혼자가 아니었지! 그렇다고 해서 나의 무대공포가 극적으로 사라지고 디즈니 영화같은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공포란 놈이 불쑥불쑥 올라올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리면 나를 제외한(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나까지 포함해서) 무대 위의 모든 존재가 '적(敵)'인 것만 같았던 시절의 엄청난 공황상태는 피해갈 수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 분께 감사하단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지금도 공포와 관련해서 여러가지 실험을 해본다. 무대에 오르기전 바하나 모짜르트를 듣는 것과 말러를 듣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은지, 따뜻한 물이 나은지 차가운 물이 나은지, 말을 하는 것이 나은지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나은지, 책을 읽는 것이 나은지, 영상을 보는 것이 나은지, 심지어 대기실에 있는 것이 나은지, 어디 화장실에라도 숨어 있는 것이 나은지 등등.
아무튼 나는 지금도 무대공포와의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여전히 무대에 오르면 토할 것 같고, 내 머릿속에 분명히 가사가 있는 건지 의심되고, 그런 나를 사람들이 한심하게 바라보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안고 노래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