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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Nov 14. 2018

어버이 은혜

우리 엄마와 아빠는 결혼을 꽤 빨리 한 편이다.

대학교 다닐 때 결혼을 해서 학교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교수님들이 과자를 사주시고, 친구들도 엄청 귀여워했다고 들었다. 당연히 귀여웠겠지. 대학생이 애를 데리고 학교에 다녔으니! 덕분에 나는 한 살 때부터 학교와 친했고, 그래서 학교가 너무 좋아 아직도 다니고 있나보다.^^;


결혼을 일찍 한 탓에 부모님 친구들 모임을 하면, 내가 늘 제일 큰 언니였고, 그래서 아이들 돌보는 일은 내 차지였다. 우리 아빠는 운동을 좋아했는데, 특히 사회인 야구팀에서 활동할 정도로 야구를 좋아했다. 그래서 주말이면 온 가족이 야구장에 갔고, 야구장 바깥에서 수많은(?) 애들을 데리고 놀던 기억이 많다. 놀려먹고, 울리고. 때로는 내가 당하고 울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아직도 정신연령이 낮은 것 같다. 나는 중,고등학교때도 초등학생 애들과 노는 게 진심으로 재밌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얻은 아이라 그런지, 과잉보호도 굉장히 심했다. 송파동에 살던 중학생 시절, 친구들이 이대 앞에 놀러간다고 할 때 난 엄마의 반대로 혼자 집에 돌아와야만 했다. 이유는 단지 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딱히 반항도 안했던 것 같다. 아무튼 친구들이 멀리 갈 때나, 혹은 밤늦게 놀때면 난 당연히 못갔던 것 같다(그래서 내가 지금도 멀리가는 걸 싫어하나?). 부끄럽지만 대학교 때도 늦은 시각까지 집에 안 들어가면 아빠가 데릴러 왔다. 아니 ‘연행’하러 왔다는게 맞겠다. ‘다정’한 그런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범죄자를 끌고 가듯 불같이 화를 내시곤 했다. 지금도 밖에 있다가 시간이 좀 늦어지면 아빠한테 혼나던 기억이 나서 마음이 불안해질 때가 있다. 차라리 먼저 데릴러 오라고 하면 그나마 좋아했던 것같다. 덕분에 지금도 클럽연주갈 때, 학교갈 때 당연하게 아빠를 기사로 쓰고 있다. 아빠가 시간이 안 되면 엄마가 대기 중이다. 데려다 주는게 당신들의 행복이라고 하니, 잘됐지 뭐. 앞으로도 쭉 잘 부탁합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엔 엄마랑 아빠가 노래부르는 장면이 굉장히 많다. 엄마가 노래부르면 아빠가 기타치면서 화음넣고. 이런 부분이 내가 음악을 하는 데 분명히 영향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노래도 엄청 잘했다. 엄마는 목소리는 좋으나 약간 박치의 기운이 있는데, 아빠는 그야말로 노래를 잘했다(물론 어릴 땐 그런 생각을 못했고, 아무데서나 노래부르는 부모님이 챙피하고 시끄럽기도 했던 것 같다). 일단 목소리가 뭐랄까, 중저음의 꿀바른 듯한 매끄러운 목소리랄까? 그리고 음감과 리듬감도 지금의 내가 생각해보면 천부적인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코드 악보가 없어도 멜로디 진행에 따라 코드를 알아서 짚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엄마와 아빠가 노래부를 때 보던 세광애창곡집이나 팝송책 그런 것들은 나의 아주 좋은 장난감이었다.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노래부르는 시간이 많았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밖에도 안 나가고 세광애창곡집 첫장부터 끝장까지 차례로 아는 곡을 다 부르기도 했다. 이런 것이 고등학교 때까지 쭉 이어져서, 고 3 수능공부하던 때도 노래방에는 한 번씩 꼭 갔고, 심지어 수능보기 며칠전까지도 '수학의 정석’ 책을 갖고 노래방에 가서 한 곡 부르고 한 문제 풀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야 놀았다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엄마는 '걸어다니는 가요대백과'일 정도로 일제시대가요부터 빠삭했다. 덕분에 나는 우리나라 초기 가요 중 한 갈래였던 ‘만요’에 대해서도 일찌감치 알고 있었고, 석사논문의 주제(1930년대 가요에 대해 썼다)를 잡을 때도 엄마의 영향이 컸다. 아무튼 이렇게 노래부르는 걸 좋아했던 것은 부모님 덕분이었다. 나는 앞으로 엄마아빠의 노래 앨범을 내주고 싶은 꿈이 있다. 얼마 전엔 요즘 유행하는 노래방 마이크를 하나 사드렸더니 흥이 날때마다 사용하신다. 특히 우리 가족은 롯데팬으로 야구를 즐겨보는데, 롯데가 이길 때면 블루투스 마이크를 꺼내 ‘부산 갈매기’를 신나게 부른다.


원래 전공은 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해볼 법도 한데, 엄마랑 아빠가 그렇게 음악을 좋아했으니, 반대는 커녕 엄청난 응원이 있었다. 아빠는 첫 앨범을 냈을 때 너무 신이나서 회사 식구들, 세션들 다 모아서 식사 대접하고, 앨범도 몇 백장 미리 구매했다. 클럽 연주를 할 때는 친구들이 클럽 입구부터 남예지! 남예지! 를 외치며 들어와서 날 다소 부끄럽게 만들었고, 모임만 있으면 클럽 매상을 올려줬다(물론 클럽 매상과 내 페이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당시에는 내 일에 너무 참견하는 것 같아 짜증을 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까 정말 엄마아빠 아니었으면 어떻게 음악을 하고 살았을까 싶다.  


그런데 아빠가 몇년 전에 뇌동맥류로 수술을 했다. 터지면 위험하다고 해서 예방차원에서 한 수술이었는데, 생각보다 후유증이 심각했다. 그 건강하고 불같던 사람이 수술 첫날 못 깨어나서 가족들 모두가 식겁했고, 하루가 지나 깨어났지만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회복된 지금도 여전히 말이 예전처럼 잘 되지 않고, 그 좋던 목소리도 변했다. 그래서 노래하는 걸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좀 아프다. 하지만 우리 가족 모두가 의외의 긍정적 마인드로 잘 이겨내고 있는 듯 하다. 예전같은 아빠의 '불같은 화’는 아예 사라져서, 요즘은 가끔 화내는 소리가 그립기도 하다. 아~~~주 약간.   


어릴 때는 부모님이 나에게 해주는 것들이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이건 아마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일 것 같다.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걷고, 스스로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지만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혼자 남겨진다면 살아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기 때는 거의 모든 부분을 부모에게 의지하게 된다. 커서 혼자 설수 있고,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이후에도 부모님에 대한 의지는 당연한 ‘습관’처럼 잘 고쳐지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비록 아이가 없지만 주위에서 아이를 키우는 걸 보면, 그건 희생 그 자체다. 나이를 먹었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낳고 길러봐야,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댓가없는 희생을 해봐야 진짜 어른이 되는 것 같다. 나도 저렇게 길러져서 오늘날에 이르렀구나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하다. 학교에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입시날 잘 차려입은 학생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 같은 것들이 허투루 보이지가 않았다. 내가 이 학생들 한명한명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해야하는 지를 부모님의 사랑 덕분에 깨달은 것 같다.


아이에게 있어 부모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언어를 모르는 아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 혹은 자신의 행위나 감정의 표현에 대한 부모의 언어를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 예를 들면, 뭔가가 불편해서 아기가 울게 될 경우, 엄마가 '우리 아기 배고프구나~’라는 말을 하게 되고 이것이 반복되면 아이는 ‘아, 지금 이런 상태가 배고픔이구나’라고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부모의 역할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부모가 된다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을 못하고 있나보다. 물론 그 전 단계도 지금 할지 말지 모를 일이지만.


노래추천 1

한계령(양희은): 엄마와 아빠는 쎄시봉 세대이다. 70년대 포크 가수들을 두루 좋아한다. 덕분에 나도 그 시대 곡들을 많이 듣고 자랐다. 특히 양희은씨를 좋아했는데, 나는 우리집에 있는 양희은 자서전을 닳고 닳도록 읽었다.


노래추천 2

목포의 눈물(이난영): 부모님들이 좋아하실만한 곡이 뭐 있을까 생각하다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트로트 곡인 ‘목포의 눈물’을 골라봤다. 이곡은 우리나라의 일제 식민지 시절에 나왔던 이난영의 노래로, 아직까지도 많이 불리고 있다. 트로트라는 장르는 일제시대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시대의 음악적 양식에 맞춰 변화해오며 살아남은 장르이다. 그래서 나는 트로트가 우리나라 대중음악에서 특히나 대단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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