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을 타는 길은 두 개다.
남산정으로 갈 것이냐? 만덕으로 갈 것이냐? 언제나 답은 정해져 있다. 나는 신호등을 건너는 수고로움을 감수하고도 남산정으로 출발한다. 7시 30분 내가 신호등을 건너는 시간이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보는 사람들이 보이면 나는 안정감을 찾는다. 늦지 않았다는 안정감.
7시 42분 지하철을 탄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패턴으로 움직이는 것에 익숙하다. 정해진 틀을 벗어나면 불안함이 나를 감싸오기 때문에 나는 그 패턴을 지킨다. 혹여 누가 내 패턴에 방해를 해오는 것 같으면 그것을 없애 버린다.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게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단 하나 내가 없애지 못하는 것은 엄마다. 엄마는 내가 방에서 나오는 7시 25분쯤 현관문의 안전장치를 풀고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있다. 20대 시절에 엄마와 이것 때문에 나는 많은 다툼을 했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그러지 마시라 백번, 아니 한 천 번은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엄마는 그걸 버리지 못했다. 내 짜증에 간혹 화가 나 며칠 그만두더라도 일주일 이내에 다시 돌아온다. 나는 그 무한 반복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엄마는 내가 이길 수 없는 시람 중 한 명이다.
지하철 안 나는 빈자리를 찾아서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튼다. 요즘은 잔나비의 노래에 빠져 있다. 몽한적인 목소리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모든 가사는 한 편의 소설 같다. ‘주저하는 여인들’이란 노래를 얼마 전에 들었는데 마치 첫사랑 소설 소나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가사를 쓴 사람은 분명 담담한 사랑을 했을 것이다. 눈물 펑펑 흘리는 애절한 사랑이 아니라 가을에 은행잎이 물드는 것처럼 소리 없이 소리 없이 그렇게 물드는 사랑을 한 사람이 분명할 거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열차는 미남을 지나고 종합운동장을 지나고 연산에 도착했다. 우수수 마치 약속을 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그 안을 또 다른 사람들이 채운다. 나는 오고 가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정한 길을 간다. 사람들 틈을 헤집고 나가지 못해 맨 뒤, 누가 끼어들면 또 그 뒤에 나는 줄을 선다. 1호선을 환승하기 위해 기다리면서 눈은 휴대폰에 고정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보기 싫다는 듯이 나는 그저 휴대폰만 보고 있다. 이 시간은 오직 나만의 시간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나의 소중한 시간이기에 나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다대포행 열차가 들어오고 사람들 틈에 섞여 나도 열차에 몸을 싣는다. 멍하게 몽한적인 그의 노래를 들으며 서면을 지나쳐 올 때쯤이었다.
‘띠링’ 메시지가 왔다. 호텔에서 함께 근무했던 차장님이다. 같은 나이여서 말이 잘 통했던, 모든 문제에 합리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맞아 함께 일하는 동안에 좋았던 기억이 남아 있던 차장님 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