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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영 Nov 30. 2023

가장 지루했던 하루

가장 지루했던 그날 구보씨를 만나다.

월요일 8시 30분.
띠링 새로운 메시지 알림이 올라온다. [오전 10시 24층 소회의실에서 팀장 미팅이 진행예정이오니, 참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김지배인님이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의 입에서는 ‘휴….’ 한숨이 나온다. 연과 설은 내 눈치를 본다. 또 뭔가 일이 생겼나? 하고 아마 생각할 것이다. 대체로 조용하지만 어떤 선을 넘어가면 나는 불 같이 화를 낸다.  간혹 그런 날에는 고은이까지 눈치를 본다는 걸 알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그런 날은 참지 않는다. 참으면 나 혼자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서가 피해를 보기 때문에 나는 간혹 나쁜 역할을 맡기도 한다.
내가 한숨을 쉰 것은 쓸데없이 한 시간을 버려야 할 것을 알기에 나는 순간 짜증이 훅 올라왔던 것이다. 그냥 습관처럼 나온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한숨을 쉬면 애들이 눈치를 볼 것을 알기에 화를 쑥 내리며 한 주 시작을 위한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9시 50분 하던 일을 멈추고 나는 24층 회의실로 간다.  당연히 모두 오지 않았다. 이넘의 인간들은 제 시간을 맞추지를 않는다. 다들 바쁜 시간 쪼개서 참석하는데 꼭 늦는 부서가 있다. 조리부     강 부장…. 식음팀 김대리…..,
한마디 하고 싶지만 참는다. 이 인간들 내가 말해서 듣지 않을 것을 알기에.


회의를 시작하는 것은 김지배인님이다. 얼마 전부터 있었던 객실 에어컨 문제에 대해서 시설팀 조차장에게 묻는다. 객실팀 하늘이도 고객 클레임으로 힘들다. 언제 조치되냐 한마디 한다. 에어컨 문제는 어떻게 되었냐 묻는데 차장은 업체가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한다. 순간 나는 확 짜증이 치밀었다. 제발 묻는 말에 답하라고 속으로 외친다. 지금 우리는 한가하게 업체의 사정을 듣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다. 해결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대책을 세울 것이냐? 그냥 둘 거이냐? 우리는 그것이 궁금하지 변명이 궁금하지 않다. 조차장의 변명이 길어지면 나는 알고 있다. 이 이야기의 끝은 없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부터 도돌이표가 시작될 것이다. ‘아 내 시간…..’ 대표가 지시한 보고서 쓰고 오후에 결재 들어가려면 월요일 오전 쉬지 않고 보내도 끝내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데 이런 무의미한 결과 없는, 결과가 절대 나지 않는 회의에 내 시간을 뺏겨야 하다니.
월요일 아침부터 비생산적인 이야기만 하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나는 쓸데없는 차장의 변명을 듣는 둥 마는 둥이다. 귀를 기울여 듣지 않아도 계약관계가 어떻고 여름이라 업체가 바쁘고, 문제가 없을 때도 있고,,,,, 하는 서두에서부터 조차장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다.
나는 노트에 ‘言わない。見ない。聞かない。’를 반복해서 적고 있다. [言わない] 문구에 색을 덧칠하고 있을 때였다.  0.38 삼색 내 볼펜이 삐끗했고, 창 밖으로 반짝,,, 쿵 소리가 나면서 26층 건물이 흔들흔들거렸다. 지진 예보가 있었던가? 고객 대피 안내방송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죽는 건가.  오늘이 나의 마지막인가. 나 아직 제대로 된 연애도 못했는데 죽을 만큼 사랑해서 새벽 밤이슬 맞으며 홀로 울어 보지도 못했는데. 이게 나의 마지막이라고. 죽음이 이렇게 단조로웠던가?
억울하다. 억울하다.
낙화보다 쉽게 내 생이 끝날 수 있나?
낙화는 애처롭기라도 하지. 꽃은 진다고 부는 바람을 탓하기라도 하지. 나는 누구를 탓해야 한다 말인가? 피어보지도 못한 꽃봉오리를 안고 나는 가야 하는가?
이렇게 쉬이 갈 것을 알았다면 열심히 살지 말 것을,,,,,

긴 잠에서 나를 깨운 것은 내 볼을 쿡쿡 찌르는 누군가의 손길이었다.
“살아있는가? 죽었는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보니 살아 있는 것 같은데” 남자가 누구에게 묻는 말인지 모를 질문을 던졌다.
건물이 흔들렸고 흔들리던 건물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아직 나 살아있나 보다. 구조대가 빨리 와 사람들을 살렸구나. 나는 안심하며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눈을 떠보니, 허름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방관이 아니네, 아  꿈인가? 생각했다. 그래 꿈이겠지. 다시 눈을 감았다.
“이것 보오. 일어나시오. 여기 계속 누워있으면 무슨 험한 일을 당할지 모르오. “ 남자의 말에 나는 꿈이 아님을 알았다. 꿈이라면 이렇게 생생할리가 없다.
“ 여기가 어디인가요? “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나를 이상한 여자쯤으로 보는 것 같았다. 동그란 뿔테 검은 안경을 쓴 남자는 익숙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 내가 아는 남자인가? 나는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이 남자가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기억에 없다.


“ 대학병원이오. 내 벗이 이곳에서 일하니 상태를 보아달라고 하겠소. 잠시 일어나 보겠소”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남자의 손은 나의 몸에 완전히 닿지 않고 나의 옷 끝을 잡고 내가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일어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남자의 말대로 병원 안인 듯했다.
“걸을 수 있겠소?” 남자는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을 표현했다. 남자가 나를 병원 안으로 안내하면서 자신의 벗은 비록 정신병을 공부하고 있지만 나의 상태를 확인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남자를 의지해 그를 따라갔다. 그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걸음을 쫓으며 나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한복인 것 같은데 한복 아닌 옷을 입고 있고, 양복 같은데 양복 아닌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상한 옷차림의 사람들에게 나는 두려움이 먼저 들어 이 남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따랐다.


하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도 복도를 한참을 걸었다. 복도 끝에 출입문을 나왔고 또 숲이 우거진 곳을 걸었다. 그 끝에 나타난 작은 건물. 하얀 건물이 병원임을 알려주었다. 정신병동 이렇게 적혀있었다. 남자가 [연구실]이라고 적힌 문을 두드리자,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나왔다. 가운에 적힌 이름은 Dr 최였다. 남자는 친구에게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나를 발견했다고 몸에 이상이 없는지 봐달라고 했다.


나는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내부를 둘러보았다. 한쪽 벽은 책으로 가득 차있었다. 온통 한자와 일본어로 된 책이어서 제목을 알기 어려웠다. 그리고 책상 하나 의자 하나, 간이침대가 다였다. 연구실이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빈약해 보이는 내부였다. 책상 위에는 조금 전까지 최가 읽었을 것 같은 오래되어서 색이 바랜 책이 있었다.  


“ 자네, 구보 오랜만이 아닌가? 오랜만에 만나면서 부탁부터 하는가?” 최라는 남자는 사람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뿔테 안경을 쓴 남자에게 구보라고 지칭하는 것을 듣고 피식 웃었다. 학생 때 배웠던 ‘구보씨의 일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던 그 남자. 고독을 찾아다니던 그 구보, 고독을 사랑한다고 고독을 찾아다니던 그 남자. 시험에도 자주 나왔었는데 그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구보씨의 하루를 생각하고 있을 때 최는 내게 다가와 간이침대에 누우라고 했다.
내 눈을 살펴보고 어디 부러지거나 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듯이 이리저리 내 팔다리를 흔들어 보았다. 불편한 곳은 없는지 묻는 최의 말에 나는 아픈 곳이 없다고 대답했다.
최는 구보에게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으나 나중에라도 이상이 생기면 의원을 찾아가라고 했다.

“구보 자네 퍽 오랜만일세. 그동안 고독을 찾아다닌다고 하지 않았나? 고독은 찾았는가?”
최는 내 머릿속을 본 듯이 구보에게 물었다.
“고독을 잊었네. 나도 한때는 고독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사이는 고독이 두려워”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란스러워졌다. 이곳을 오면서 보았던 사람들의 옷차림, 병원에서 볼 수 없던 간호사 복을 입고 있던 여자들, 한복을 입은 여인들, 기모노는 입은 여자들, 구한말에나 있을 듯한 건물,,, 그리고 여기저기서 들리던 일본어로 대화하는 사람들. 혼란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구보라면 내가 알고 있던 그 구보가 맞나? 아니다 꿈일 것이다. 내가 동경해서, 꿈을 꾸는 것 같다. 나는 아마도 꿈속에서 구보씨를 만나고 있나 보다. 생각하며 볼을 꼬집었다. “아악..” 짧은 내 비명에 두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 무슨 일이시오? 어디 아프오?” 최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구보씨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구보씨는 닮아 있었다. 박태원 작가와. 사진으로 본적 있는 뿔테에 검은 안경. 단정해 보이던 인상이 인상적이었던 박태원 작가. 구보씨가 그처럼 보였다.
“ 혹시 오늘은 며칠인가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 임신년이오” 임신년 그럼 몇 년도인가? 다시 나는 물었다. ”그런 몇 년도인가요? “ 나의 물음에 당황한 듯하지만 구보씨는 나에게 다시 일러주었다. “1933년이오 “
아… 나는 주저앉았다. 꿈이 아니라면 나는 1933년도 구보씨와 함께 있는 것이다. 여기는 소설 속인 것이다. 죽어서 여기로 온 것인가? 요절한 내가 불쌍하여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건가? 내가 동경하던 시대로 온 것인가? 젊은 나이에 사고로 죽은 내가 가련하여 나를 이곳으로 안내했나.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불쌍했다면 왜 하필 구보씨의 이야기이지. 구보씨는 재미없는 사람이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하루종일 걷고 전차를 타고 사람 구경하는 것이 다인 지루한 사람이 구보씨다.  왜 하필 구보씨인가?
그럼 나의 역할은 뭐지? 구보씨에게 여자는 없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는 그의 어머니와 이웃 아주머니, 전차에서 마난 여성이 다이다. 내가 기억하는 소설 속에서 여자는 그게 다였다. 그는 매일 밖으로 나가지만 여자를 만나지는 않았다. 아니 만나기는 했다. 우연히 전차에서 여자를 보기는 했다. 내가 그 여자인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1934년도에 발표되었으니, 구보씨의 말이 맞다면 지금은 소설이 발표되기 1년 전 어느 날인 것이다. 이때도 구보씨는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나 보다.

퍽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구보가 여인을 봐 달라고 했을 때 당황했다. 신식인듯한 단발머리를 한 여자는 나를 빤히 쳐다봐서 당황하게 했다. 여인이 나를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 경우는 없었다. 이 여자는 부끄러움도 없는가. 남자의 얼굴을 이렇게 쳐다보다니, 문득 나는 이 여인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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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회의가 싫어 나는 잠시 상상했다. 구보를 만난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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