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의 탄생

-밴쿠버와 양평의 '발'(교통)

by 유진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는 노스(north) 밴쿠버의 산 속, 푸른 색의 짧은 치마를 입은 한 동양인 여자가 다급하게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다. 여자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사위를 둘러보아도 어둠이 잠식하고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다. 완전한 어둠이 내린 순간, 여자는 결심한 듯 손을 들어올린다. 인적이 드문 도로에 검은차가 나타나자 여자는 사활을 건 몸짓으로 운전자에게 신호를 보내 차를 얻어탄다. 검은 머리칼에 하얀 피부, 파란 눈동자의 백인 운전자에게 숙소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도로의 표지판을 보니 노스 밴쿠버를 지나 아래 지역으로 재빠르게 내려간다. 경악한 여자는 남자에게 숙소 주소를 다시 말해주지만 남자의 눈은 괴이하게 풀려있고, 묘한 냄새가 난다. '약을 한 것일까?' ......


밴쿠버에서는 '자동차가 발이다'라는 말이 있다. 차량이 없으면 도저히 생활이 안 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위의 글 속 여자는 밴쿠버에서의 '나'였다. 초특급 겁쟁이였던 나는 외국에서 차량 운전하는 게 무섭다고 차량을 렌트하지 않았고, 밴쿠버 도착 다음날 위와 같은 일을 겪었다. 마약을 한 것 같았던 운전자는 다행히 나를 숙소까지 태워다 주었고 나는 지금까지 생존해있다.

양평에서 7년 정도를 살면서도 차와 관련해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다. 때로는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도 있었다. 첫 전원주택은 산 속에 폭 안겨있었기에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교행이 안 되는 좁은 길이어서 다른 차를 만나면 진땀을 뺐다. 눈이 내린 아침 뭣 모르고 차를 끌고 내려오다 눈길에 미끄려져 식겁을 하고는 차를 두고 눈길을 내려와 도로에서 히치하이킹을 해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준 적도 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번화가인 문호리에서 10분 정도 더 들어와야 하는 곳이다. 교통은 나에게 최우선 순위가 아니었기에 나는 이곳을 새로운 거처로 선택했다. 또한 방에만 들어가있는 고등학생 아들들을 픽드럽해주다 보면 대화도 많이 나눌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하고 낭만적인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낭만과 현실의 일치란 로코 속 남주가 남자친구가 될 수 있는가만큼 실현불가능한 일이다. 코로나 때문에 격주로 등교하는 고1, 고2 아들들을 아침, 오후에 양수리역으로 태워주고, 문호리 학원에도 태워주며 본격적인


'허기사'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집에서 양수역까지 왕복 30분, 집에서 문호리 학원까지 왕복 20분, 이런 일상이 반복되었다. 게다가 고1,고2가 모두 학교에 가야하는데 그 시간이 오전, 오후로 다르다면 허기사는 이렇게 움직인다. 오전에 양수역까지 왕복(큰애 등교), 낮에 양수역까지 왕복(큰애 하교와 동시에 작은애 등교), 오후에 양수역까지 왕복(작은애 하교). 바로 오늘 같은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양평은 교통이 불편한 지역이다. 이주민인 경우 대개는 양평 사정은 알고 내려오고, 어른들은 크게 문제가 없다. 문제는 아이들이다. 양평에서는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학교의 개수가 줄어든다. 내가 사는 서종 지역에서는 고입의 경우 양수리에 있는 양서고등학교(양평지역할당으로 60명이 들어갈 수 있지만 최근 경쟁률이 심해져 중학교 내신이 아주 좋아야 입학한다.), 양평읍에 있는 양일고, 양평고, 덕소에 있는 와부고, 덕소고 등으로 간다. 양서고를 제외하면 다들 멀리 떨어져 있다. 초등학교의 경우는 셔틀 버스를 운행하는 경우가 많지만 중학교 이후부터 셔틀 운행은 내가 아는 한은 없다.

그러면 아이들은 집까지 걸어오거나 버스를 타야하는데 이 버스란 것이 농부가 비 내리길 빌며 목을 빼고 하늘 쳐다보듯 그래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살다보면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역시 없는 것이다. 허기사로 재탄생한 나의 6개월은 번잡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었는데 이사온 지 한 달쯤 지나서 몇몇 집에 늦은 인사를 다니며, 우리애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부모를 만났다. '오~ 구세주'를 외치던 순간이었다.


지금은 이 언니네의 차를 얻어타기도 하고, 몇 번 정도는 시간이 맞는 버스를 타고 애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도 해서 허기사가 숨 쉴 구멍이 조금은 생겨났다.


이렇게 적다보니 쉽게 낭만에 기대어서는 안 되겠다는 깨달음이 온다. 현실의 '나'는 때로는 피곤하고, 때로는 많이 바쁘고, 때로는 만사가 귀찮다. 돈 벌고, 살림 하고, 동물 돌보고, 마당일 하고 할 일이 많다. 그러니 허기사 노릇이 버거워질 때도 있다.


다만 이 생활은 내가 선택했다는 것, 안쪽 마을로 들어와 더 조용하고 자연이 많은 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 오며가며 자연의 변화와 무지개빛 꽃들의 향연을 볼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아들들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으로 나는 나를 위로하며,


오늘도 '허기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다.


(그럼에도 양평 역시 '자동차는 발이다'라는 말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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