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텃밭 밥선생
187센티에 65킬로밖에 되지 않는 호리호리한 나의 큰 부록이 헬스장에서 PT를 시작했다. 관장님의 주도면밀한 지도하에 그는 '닭다리살을 먹겠다, 3000칼로리 이상을 먹겠다'라며 매 끼니 칼로리를 계산하고, 저녁밥은 밥공기가 아닌 국그릇에 그것도 두 번씩이나 섭취하시며 대식가의 길로 회귀하고 있다. 그 덕분에 우리 집 엥겔지수는 수직 상승을 할 상황에 직면하고 있으며, 게눈 감추듯 사라지는 반찬, 국, 메인 요리를 해대느라 나는 영혼과 몸을 갈아 넣고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 집 정원의 텃밭이련만 서리를 몇 번 맞은 텃밭, 게으른 주인장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한 요즘의 텃밭은 모양새를 갖추지 못한 작디작은 배추와 상추뿐이니 이를 어쩌란 말이냐!
역시 가을~, 가을을 노래할 뿐이다. 가을의 텃밭은 그래도 풍성했으며, 시기를 역행하는 요술도 보여주었다.
올해 깻잎은 떡볶이의 토핑으로, 김밥 속 재료로 자주 활용되었으며, 아삭고추는 쌈장에 콕 찍어서 아삭아삭 잘도 먹었다. 피망과 파프리카는 잡채에 넣거나 볶음 요리에 들어갔지만 생각보다 손이 잘 안 가는 채소였다. 상추는 쌈을 싸 먹거나 열심히 담갔던 열무김치와 함께 열무비빔밥의 재료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었다. 이모작이 가능했던 상추의 덕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저러나 나는 텃밭에서 진기한 풍경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런 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자연의 경이라고 할까, 지구온난화 때문인 걸까는 모르겠으나 이미 수확한 감자였건만 다시 솟아오른 감자잎과 작년에 심고 올해는 심지 않았던 참외의 등장은 그야말로 서프라이즈한 자연의 선물이었다.
이렇게 수확한 농작물은 우리 집 엥겔지수 유지에 그 나름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들은 가족에게 보내지는 선물이 되기도 하였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그저 죄송할 따름인 엄마에게 드리려고 마당에 피어있는 달리아, 메리골드, 청화쑥부쟁이를 따 병에 꽃아 차에 실었다. 그리고 그중 튼실한 가지와 하나밖에 수확하지 못한 참외, 고추, 부추 등을 씻어 지퍼백에 담았다.
이렇게 쏠쏠한 재미와 맛을 선사했던 텃밭이건만 이제 엥겔지수의 급격한 변곡점을 맞이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겨울의 초입이라니. 그래도 부지런히 애를 쓰며 자라고 있는 늦깎이 배추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배추전과 배춧국을 작년에 잘 해 먹었던 터라 올해도 기대하고 있다.
(내년에는 기필코 재빨리 배추와 무를 심으리라 결심해본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