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지우려고 하는데 힘 빼지 말자.
억지로 지우려고 하는데 힘 빼지 말자.
아이가 자라면서 시기가 지난 옷이나 책은
물려주거나, 중고로 팔거나, 버리거나...
그렇게 하나씩 정리하게 된다.
미니멀 라이프가 대세라고 해도
아이의 물건은 아이의 성장과정에 많은 추억을 담당하고 있어서
늘 떠나보낼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
이혼을 하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로 이사 와서
꽤 많은 가구며 살림용품을 새로 샀지만,
책이나 교구 같은 아이의 물건은 거의 그대로 들고 왔기에
새로운 것들 틈에서
과거의 추억을 담고 있는 손 때 뭍은 물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눈에 띄고, 존재감을 드러낸다.
새로운 동네, 새로운 집, 새로운 마음가짐이었지만,
동시에 과거의 기억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
하지만
아이가 성장하며 세월이 지나는 동안
과거의 흔적은 자의든 타의든 하나씩 사라지고 희미해져 간다.
엄마 아빠가 함께 품에 안고 읽어주던 그림책도,
엄마 아빠가 함께 손을 잡아주며 산책하며 신었던 꼬꼬마 신발도,
엄마 아빠와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아 젓가락질을 배우며 사용했던 유아용 젓가락도..
하나씩 버리거나 주변에 나눠주거나, 중고로 처분하며
동시에
지나간 시간과 흔적들이
지금의 공간에서
새로운 물건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렇게 우리는 소소한 주변의 사물들을 보며
단칼로 잘라내는 기억과 인연이 아닌,
과거의 추억과 감정에 대해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가지게 된 것.
때론 그립고, 때론 슬프고, 때론 아파하며...
과거는 자연스레
그렇게 희미해져 간다.
그렇게 조용히 잊혀져간다...
며칠 전,
아기새처럼 귀여운 목소리로, 예쁜 몸짓으로
노래하고 춤추던, 추억의 영어전집을 정리했다.
갑자기
책장 한켠 구멍처럼 생긴 그 빈자리가
왠지 허전하고 쓸쓸하게 보였지만
당장 뭔가를 채워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이다음엔 어떤 것이 저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 하는
기대감을 채워놓기로 했다.
고인 물을 흘려보내야 새로운 물을 채울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과거의 흔적을 흘려보낸 그 자리자리마다에
또다시 새로운 기억과 추억을 만들어가며
그렇게 온전한 일상을 유지해 간다.
물론 물건이 사라진다고
기억이, 추억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테지만.
과거의 물건을 정리할 땐
왠지 새살이 돋아나고 있는 상처 위에 굳어진 딱지를 조심스레 떼어낼 때처럼
약간은 신경 쓰이고, 의식하게 되는 그런 마음이 든다.
덧) 얼마 전, 티브이에서 우연히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한 초등학생이 "지우개요, 사소하지만, 쓰고 닳으면 없어져버리고, 틀린걸 다시 바로 고치려면 꼭 필요한 것이니까요"
아하, 하고 또 하나를 배운 찰나.
'내 마음의 지우개도, 정말 틀린 걸 고쳐야 할 순간에 쓸 수 있게, 너무 빨리 닳아 없어지지 않게 아. 껴. 써야지.'
때론 희미한 흔적 정도는
너무 빡빡 힘주어 지우려 하지 말고
너그럽게 웃어넘기고 포용하는, 포근하고 여유로운 나의 일상이 되길,
덧 2)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포장이사할 때 아주머니가 그냥 마구잡이로 포장해서 넣어준
전남편의 등산지팡이라던지, 구두약이나 구둣솔이 아직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네 ㅋ
아마 평생 그런 크고 작은 흔적들이
문득문득 존재감을 드러내겠지, 싶으니 피식- 웃음이 나네. ㅋ
-2018년 10월 어느 날
(이혼한 지 2년이 넘었어도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고, 2024년 6월, 이혼한 지 10년 차가 되어도 아직도 가끔 흔적이 나온다는 사실, 억지로 지워야 할 것이 아닌, 그저 세월에 희미해지고, 아련해지는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