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은 아직 사춘기라서...
모닝페이지를 쓰다 보면 지금의 내 나이인 서른아홉의 나뿐만 아니라..
스물아홉의 나, 열아홉의 나, 심지어 아홉 살의 나도 만나게 된다.
내 안에 꼭꼭 숨겨져 있던 아이 마음이 마구 올라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그래서 몹시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아무리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이고 막 쓰는 글이라지만 ‘어른으로서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그렇다.
나는 자기 검열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런 내 모습이 수치스러웠다.
아직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는 인간이 싫었다.
어느 날 책에서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참된 어른이란 어른의 마음부터 어린이의 마음까지 유동적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어린이의 마음이 있어야 아이를 키울 때 그 아이의 입장을 헤아리고 좀 더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어
육아를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뭐 그런 의미의 이야기였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댕’하고 마음속 종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 어린이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어른’이란 말을 듣고 자랐다.
어찌 그리 어른스럽고 이해심이 넓냐고 칭찬을 받곤 했다.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고 싶다고 떼를 쓴 적도 거의 없다.
그냥 일찍이 부모를 이해하는 아이였다.
이게 우리 부모님께는 큰 도움이 되었는데 내 아이에게는 독이 되었다.
내 딴에는 한다고 했는데 여전히 모자란다고 하는 아이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가 뭐 그리 원하는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지.
‘엄마가 이만큼이나 해줬으면 좀 적당히 바래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어른스럽게 자란 나와 다르게 내 딸들은 아이답게 크길 바랐지만,
막상 내가 바라는 대로 이뤄지자 감당이 되지 않았다.
이를 상담하기 위해 코칭을 신청했다.
“떼를 써봐.”
“네?”
“세 살 아이처럼 떼를 써보라고. 징징대봐.”
코치님의 요구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첫째가 너무 징징대서 힘들다고 했지? 첫째가하는 행동 그대로 해봐.”
“지금이요? 여기서요?”
“응. 지금 여기서.”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동동거리고 있는데 코치님은 너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눈 한번 깜빡여 볼래?’ 정도를 요구하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까라면 까야지 어찌하겠는가.
나는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리고 팔다리를 휘저으며 힘차게 외쳤다.
“하기 싫어. 싫다고! 나 그거 싫어! 하기 싫어!”
“에이, 그 정도 아닐 텐데. 더 해봐.”
쑥스러워 소극적으로 굴었던 게 티가 났는지 코치님이 은근히 나를 도발했다.
“하기 싫다는데. 왜 시켜! 나는 이거 하기 싫다고!”
“그렇지.”
코치님의 추임새에 힘입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징징대는 딸처럼 떼를 쓰며 온 바닥을 굴러다녔다.
부끄러움은 잠시 통쾌한 기분이 들어 어느새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코칭 시간이 끝나갈 즈음엔 더 하고 싶어 아쉬울 정도였다.
코치님이 왜 이런 행동을 나에게 하라고 했는지 집에 도착해서야 비소로 알게 되었다.
“엄마아! 왜 이제 왔어. 내가 빨리 오랬잖아. 얼마나 기다렸는데. 일찍 왔어야지.”
콧소리를 내며 징징대는 아이가 미워 보이지 않았다.
그저‘나를 많이 기다렸구나. 보고 싶었던 마음을 저렇게 표현하는 거구나.’ 아이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사실 징징대는 아이가 부러웠던 걸까?
아이처럼 징징대보니 그런 아이의 모습이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
“엄마 기다리느라 많이 힘들었구나? 엄마도 우리 딸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차가 막혀서 엄마도 속상했어.”
아이의 마음에 공감해 주는 한마디에 징징이 쏙 들어가 버렸다.
“엄마 나 오늘 이거 했는데 한번 봐봐.”
재잘재잘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어떤 재미난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엄마가 보고 싶었던 마음에 볼멘소리 하는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얼굴 보자마자 또 징징댄다며 짜증이 났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아이의 마음이 저절로 이해가 되었다.
억지로 아이를 달래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이의 마음에 공감해 줄 수 있었다.
너무 귀중한 경험이었다.
‘징징대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언짢거나 못마땅하여 계속하여서 자꾸 보채거나 짜증을 내다.
무언가 불편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데 그걸 표현하는 방법이 미숙하니 일단 짜증을 내고 보는 것이다.
이럴 땐 그저 아이를 도와주면 되는 것이었다.
‘네가 이러해서 짜증이 났구나!’ 공감하고 ‘이렇게 표현해 보는 게 어떨까?’ 표현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실 이 또한 쉽지 않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도통 모르겠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땐 그저 지켜보자.
아이의 마음이 사그라들 때까지.
온 방을 휘저으며 난동을 부리는 아이의 징징이 끝날 때까지.
내가 징징을 해보면 아이의 징징을 너그러이 봐줄 수 있다.
나는 ‘지랄 총량의 법칙’의 법칙이 있다고 믿는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 자기 마음껏 지랄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짜 내 욕구를 알 수 있고,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떤 행동이 옳은 것인지 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해 보았으니 지랄하며 자라나는 아이들도 ‘그럴 수도 수 있지. 다 크는 과정이야’라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켜봐 줄 수 있겠지.
어릴 때 맘껏 징징대고 지랄해보지 못한 나는 어느 면에서는 여전히 속 좁은 엄마다.
아마 총량을 다 채우지 못한 탓일 테다.
성인이 된 나는 아이처럼 온몸으로 지랄할 수 없으니 매일 아침 글로 지랄을 한다.
나의 사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부디 우리 딸이 진정한 사춘기가 오기 전에 나의 이 지랄 총량을 채울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