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1. 한라산 설산 등반기
코스: 관음사-삼각봉대피소-백록담-진달래대피 소-성판악
출발 시간: 오전 7시 30분
소요 시간: 9시간 56분
“관음사 도착했습니다”
셔틀버스 아저씨의 외침에 잠에서 깨어나 부랴부랴 내렸다. 20명 남짓 돼보였던 사람들 중 관음사코스에서 내린 사람은 4명. 우리 2명, 커플로 보이는 남녀 2명. 힘든 하루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함과 동시에 콧 속으로 들어온 맑고 찬 공기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아직 어둑어둑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산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오를 준비를 해볼까, 모자부터 쓸까?
내 모자 어딨지! 어 내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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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버스 옆구리를 치며 따라갈 날이 올줄이야 :) 드라마에서만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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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멈춰선 버스, 바닥에 떨어지 모자...그리고 스패츠. 너는 왜 여깄니ㅎㅎ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발하며 얼른 데리고 나왔다.
큐알코드, 신분증 확인하고 등반 시작!! 설렘반 걱정반
산 오르기 전에 요런 선덕선덕한 기분 너무 좋아아
어두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밝았다. 랜턴없이도 걸을 수 있을 정도!
내가 미역나무라고 이름 붙인 나무. 진짜 이름은 모르겠다. 등산 초반에 이 나무가 굉장히 많았는데, 이파리들이 아래로 축 처져있으니까 괜히 스산했다.
왜 저럴까 만져보고 나서는 조금 불쌍했던 나무. 얼어서 그랬던 거였어.
탐라계곡 도착. 포기하고 싶었다.
“으나 니는 등산하면서 무슨 생각해?”
“여기 왜 왔을까, 포기하고 싶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생각해.”
하루는 친구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등산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었다. 대단한 생각을 할 거라고 기대했다면 미안해. 포기할까vs정상은 가야지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는 속마음. 그러다가 문득 마주한 예쁜 장면에 ‘아, 내가 이걸 보려고 여길 왔지.’ 하며 또 힘든 거 잊고 다시 올라 간다. 생각이 단순해져서 등산을 좋아하는 거일지도.
얼마나 걸었을까. 땅만 보고 걷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펼쳐진 나무 숲. 이때까지 본 나무 기둥중에 제일 예쁜 색이었다. 사진엔 잘 안 담겼지만, 내 눈에 저장. 밴쿠버 어느 숲 속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름은 기억 안 난당). 난 요런 울창한 숲재질을 좋아해.
산을 오르다 보면 높이에 따라 식생하는 식물들이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없이 걷다 문득 주위의 식물이 바뀐 걸 발견했을 때의 신선함도 등산의 묘미.
이 곳은 겨울왕국. 하늘도 나무도 땅도 모두 하얀 세상.
한라산의 설산은 스케일이 다르다. 강아지들이 왜 눈을 보면 날뛰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 리트리버 1명 추가요.
날씨 원숭이 덕분이었을까. 날씨가 점점 맑아졌다. 백록담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점점 커졌다! 눈이 조금씩 내리고 흐리길래 통제만 안 돼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날씨 원숭이는 같이 간 금손 선생님의 귤 아-트로 탄생! 백록담이 너무 보고 싶었던 우리는 얘네라도 붙잡고 기도를 했다. 날씨 원숭이라고 이름도 붙였다. 샤머니즘 최고
삼각봉이 저어멀리 보였을 때, 진짜 반가웠다. 진짜 너무 반가웠다. 우리 이제 쉴 수 있구나. 너무 좋아서 사진도 남겼다.
삼각봉대피소 안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자리를 겨우 찾아 바닥에 앉아서 주먹밥을 욱여넣었다. 빠른 산행을 독촉하는 안내방송, 붐비는 사람들로 인해 여유로운 휴식 시간은 아니었지만, 따뜻하게 몸을 녹일 수 있어서 좋았다. 다시 가보자고.
두다다다. 뒤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옆으로 슬 비켰더니, 특전사 군복입은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계속해서 지나갔다. “화이팅,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네준 한마디에 또 에너지 충전하고 걷기 시작했다.
산을 타다 보면 등산객들과 한 마디씩 주고 받는 게 큰 힘이 된다는 거. 사람은 역시 소통해야혀.
발 아래 구름이 있다니. 내가 이 높은 곳을 걸어올라왔다니. 중국 태산이 처음이었다. 구름 위를 걷던 그 길을 아직 잊을 수가 없는데, 한라산의 이 곳도 평생 못 잊을 거 같다.
백록담의 옆부분이 보이던 순간. 이거 설마 백록담이야? 설마 설마하며 들뜬 기분으로 걸어갔다. 기록하는 지금도 씐나요.
조상님 감사합니다!! 2022년 크리스마스에 예약해둔 백록담 탐방이 다 취소되면서 잠깐 원망도 했었어요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얘기가 있으니까요) 두 번째 도전만에 이렇게 예쁜 백록담을 보여주시다니저도 덕을 쌓아 후대가 멋진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할게요
한 시간 동안 추위에 떨며 기다린 끝에 건진 정상석 사진. 추위는 잠깐이나, 사진은 영원하다. 사진 찍어주신 아주머니가 얼굴이 하나도 안 보인다고 했는데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레고 같잖아.
백록담은 동절기 오후 1시 30분까지만 머무를 수 있다. 정상석 사진을 찍고 나니, 하산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재정비를 하고 성판악코스로 하산길에 올랐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등산은 하산이 8할이다. 산을 내려올 때 한 발 한 발 더 집중하게 되고, 그 만큼 더 힘들다. 인생도 같은 거겠지..? 인생의 정점을 찍어 본 적은 없지만 유명 연예인들이 항상 하는 말을 떠올려 본당. 내려올 때 잘 내려와야 한다.
소백산에 이어 한라산에도 눈오리 남기기. 생각보다 까다로운 눈오리! 포슬포슬한 눈으로 만들면 뭔가가 없다. 머리가 없거나, 반틈이 없거나, 형태조차 없거나. 밀집도가 좋은 눈을 잘 골라야 하는데, 같이 간 선생님이 장인이 되었다. 이 눈이면 오리가 만들어질 거 같다! 해서 이리 탕, 저리 탕 쳐서 만든 결과물. 너모 귀여워요옹
셔틀버스 시간 때문에 한 시간 가량 뛰어내려오는 바람에 막바지엔 무릎이 안 굽혀졌다. (결국엔 못 탔다)아래쪽에서 차 소리 비슷한 것이 웅웅 거리며 들렸다. 와, 속세의 소리. 희망을 안고 절뚝거리며 내려오는데 저 멀리 오른편에 성판악코스 입구가 보였다.
감격스러웠다.
와 내가 해냈구나
평소 혼자서 등산을 자주 갔다. 내가 걷고 싶을 때 걷고, 쉬고 싶을 때 쉬었다. 두 명이서 함께 한 이번 등산을 통해 느낀 점. 혼자서 잘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이 간 사람과 호흡을 맞춰서 함께 가야한다는 것. 많이 부족했던 산행이었지만, 발 맞춰 걸어준 구쌤에게 너무 고맙다.
2023년 시작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