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없고 마음이 지친 날에는 산책을 한다.
어떤 날은 음악을 듣고
또 어떤 날은 뉴스를 들으며 걷는다.
한참을 걷다 보면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답답함이 내려가고
뭉친 실타래 같던 정신이 조금씩 풀어져 간다.
퇴근하는 길,
운전을 하는 두 손에 힘이 들어가고 머리가 멍해지고 한숨을 길게 쉬는 것을 보니
오늘, 힘든 하루를 보냈나 보다.
집에 도착하여 저녁을 간단히 챙겨 먹고는
경량패딩에 팔을 집어넣고 운동화는 반쯤 구겨 신은 후 문밖을 나섰다.
가을바람이 차가웠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늘 걷던 공원길에 들어섰는데 가로등 아래 떨어진 낙엽들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나는 굳이 맨들한 길을 놔두고 낙엽 위에 발을 내딛는다. ‘사그락’ 소리가 들렸나.
듣고 있던 음악을 줄이고 다시 한번 낙엽을 밟는다.
으스러지는 낙엽이 신발 속에 있던 발바닥에 닿는 듯했다.
‘사그락’ 소리가 낙엽의 마지막 유언 같았다.
- 나는 내 할 일을 마쳤고, 그걸로 충분해.
이어폰을 빼고 낙엽 위를 걸었다.
‘사라락’
저마다의 생을 마치고 내는 소리가 슬프지 않았다.
작은 바람에 한 곳으로 모인 낙엽들은 길을 만들어냈고 나에게 그 길로 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 이 길로 가면 돼.
좁고 고불고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걷는데 가로등 빛과 함께 낙엽이 떨어져 내린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떨어지는 낙엽이 아스팔트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아플 만도 한데 소리 하나 없다.
제 몫을 다하고 떨어지는 낙엽의 고요한 낙하가 아름답다.
사진으로 담고 싶어 몇 번을 찍었지만 고요하고 아름다운 낙하를 사진에 담을 수 없었다.
-나의 낙하는 참 아팠는데, 너의 낙하는 고요하구나.
임용시험을 정상이라 여겼던 나는 계속되는 낙하 속에서 절망했다.
그때의 낙하는 참 아팠다.
오르기 위해 기를 썼던 20대. 그때의 낙하는 좌절과 실패였다.
40대를 시작하는 지금의 낙하는 아프지 않을 것 같다.
학교에서 또 교회에서 아이들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작은 위클래스 안에서 상처 입은 아이들을 위로하며,
퇴근 후에는 좋은 사람을 만나거나, 뉴스를 보며 뜨개질을 하는 삶.
나는 내 하루를 살아냈고 타인과의 비교와 세상 기준이 아닌 존재하는 나와 내 삶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렇게 주어진 삶을 책임지며 살았고, 충분히 살아낸 나의 낙하는 아름다울 것이다.
충분히 살아낸 후 낙하한 곳은 다른 이들이 낙하한 자리의 한편 일 것이다.
우리 엄마. 엄마의 엄마가 충분히 살아내고 낙하한 곳의 언저리에 떨어질 것이다.
입시를 함께 고민해 주었던 담임샘. 부족하고 모난 나를 묵묵히 바라봐준 목사님.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준 친구들. 나를 무시하고 수치심을 줬던 동료. 내 삶의 일부에 머물렀고 나를 다듬고 지금의 내가 되게 한 사람들과 함께 길을 만들 것이다.
지각을 면하게 한 택시기사님. 배고플 때 들렀던 편의점 알바생.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내 삶 곳곳에서 마주친 그들 또한 어디선가 길을 만들어내고 있겠지.
수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살아내고 낙하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길 위를 내가 걷고 있음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그들이 만들어간 길 위에 서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생을 살아내고 낙하한 이들을 위한 찬사가 아닐까.
언젠가 충분히 살아낸 후 떨어질 나의 낙하도 고요하고 아름답기를..
그 길을 밟는 사람들에게 ‘사그락’ 하는 소리 정도 들려주는 낙하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