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나야마를 공부했다. 다음은 아사나와 프라나야마의 연결이다.
호흡을 하며 동작을 이어가는 것은 어느 운동이나 마찬가지이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아사나와 프라나야마에는 요가의 철학(혹은 목적)이 들어있다. 어떤 운동이든지 숨을 쉬지 않고 우리가 살아있을 수 없기에 동작 하나에도 들숨과 날숨을 효과적으로 배치한다. 역기를 들 때도, 팔 굽혀 펴기를 할 때도 턱걸이를 할 때도 자세의 순서와 호흡의 순서는 조화를 이룬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운동을 하게 될 때면 그 헐떡거림이 운동의 효과라고 생각한다. 달리기도 하다 보면 조금씩 숨이 가빠오는 시간이 늦춰지면 드디어 체력이 좀 붙었다고 생각한다. 요가의 아사나와 프라나 야마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거기서 시작되다. 헐떡이지 않고 천천히 호흡을 늘려가며 동작의 범위를 넓히는 것으로 순서가 반대가 되겠다.
아사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육체적인 동작, 자세이다. 요가의 동작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그 시퀀스: 연결 동작들도 이름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핫요가나 빈야사, 아쉬탕가라고 불리는 수련들을 하고 나면 숨이 차오르고 땀이 샘솟는다. 때론 다른 어떤 운동보다도 격렬하게 진행되기도 해서 온 몸의 힘을 다 소진하게 된다. 사실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요가를 통해 에너지를 소비하고 운동을 하며 뭔가 소비한 후의 뿌듯함이 요가의 목적과 다를 꺼라고는. 분명한 것은 우리는 포장된 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 yogaindailylife.org /thelivingyogablog에서 참조하였습니다.
포장된 요가는 상업적으로 변질된 우리나라의 요가 시장의 문제이다. 누구도 호흡을 유지하며 동작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이 최종적으로 가야 하는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한 준비작업이라 얘기하지 않는다. 어려운 동작을 얼마나 아름답게 완성하느냐에 집중된 광고에는 건강과 미를 적절히 뒤섞은 듣기 좋은 말들만 가득할 뿐이다. 호흡과 동작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몸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준비라는 말을 스치듯 할 뿐, 천천히 호흡하는 법이나 스스로의 조절 능력을 키우기 위한 단계적 수련을 얘기하지 않는다. 물론 비용이 드는 개인 수련의 경우는 각자의 특성에 맞게 하나씩 채워나가겠지만 한 달에 십만 원 넘게 등록하는 요가원에서도 기본적으로 왜, 어떻게, 무엇을 위해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십 분 정도는 할애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YOGA SUTRA : 기원전 2세기 무렵의 인물로 추정되는 빠딴잘리가 정리한 요가 철학에서 언급했던 8가지 중에 두 가지인 아나사와 프라나 야마를 따로 혹은 함께 얘기하는 글들이 많다. 사실 프라나 야마를 별도로 언급하며 아사나와 구분 짓는 글은 많이 봤다. 그러나 아사나를 호흡(프라나야마를 에너지의 조절이라고 본다면 조금 벗어나겠지만 단순하게 번역하기로)을 빼고 얘기하는 글은 본 적이 없다. 왜일까? 우리가 요가에 갖는 이미지는 화려한 자세가 대표적인데 그 아사나가 프라나야마를 빼고 얘기할 수 없다니. 게다가 아사나의 중요성이 몸으로 행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단련에 있지 않다니.
해탈,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득도를 하기 위해 출발한 요가에서 육체로 행해지는 아사나는 정신으로 행해져야 하는 마음의 안정을 위해 호흡으로 이어져 있다. 여러 가지 아사나의 동작들은 그 궁극의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 몸을 제어하기 위한 준비작업이고 마음과의 연결을 위해 호흡이 필요한 것이다. 호흡의 조절이 단순히 동작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함이 아니라 동작을 하면서도 안정된 호흡을 가져가는 것이 먼저이다. 가끔 안 되는 동작을 하기 위해 숨을 참아가며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기승전결을 거꾸로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흡이 되지 않는 동작을 시키는 선생님이나 억지로 해내면 뿌듯해하는 수련생이나 모두 요가가 아닌 다른 운동으로 체력을 증진시켰어야 하는 게 아닐까.
요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아사나'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된다.
아사나를 단순한 동작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요가를 이해하는 것을 육체의 움직임으로만 생각하는 것의 한계이다. 아사나는 근육과 관절, 신경과 혈관 시스템 등 몸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몸에서 발생하는 모든 변화는 우리의 뇌, 혹은 생각, 마음을 함께 움직인다. 운동을 하면 카타르시를 느끼는 작용이 과도하게 분출되는 엔도르핀이고 그 쾌감은 마약과 같아 운동중독이 생긴다고 하듯이, 아사나를 통해 강함과 균형을 이루면서 함께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마음의 평온이다. 죽을 것 같이 다리를 찢고 몸을 틀어가며 힘들게 동작을 유지하는 게 마음의 평온이라니, 요가를 오랜 기간 수련하여 유연함과 강함을 동시에 지닌 몇몇을 빼면 평온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멀게만 느껴질 테지만 잘 생각해보자. 요가를 통해 몸의 변화를 이끌어내도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일상은 다시 무너지게 돼있다.
요가를 잘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몸상태를 더 잘하는 숙련자와 비교해가며 억지로 맞추기보다는 한 가지 동작이라도 내 몸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깊숙한 호흡을 통해 천천히 스스로 움직여가야 한다. 아사나의 자연스러움이 몸에 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안 되는 여러 가지 동작을 열심히 따라 하지 말자. 한 동작을 하더라고 들숨과 날숨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천천히 익숙해지는 거다. 아사나는 숨을 마시고 내쉬는 호흡과 함께 행해져야 하는데 경직되거나 급하게 자세를 잡다 보면 숨이 가빠지거나 모자라서 얕게 숨을 쉬게 된다. 몸에 돌아다니는 산소들은 전해질 시간이 없고 움직임으로 인해 발생되는 더 많은 이산화탄소들은 몸속에 남게 된다.
기본 원칙을 이해하고 지키도록 노력하자. 숨을 마실 때 우리가 가슴과 배를 확장하듯이 확장의 자세를 취할 때는 들이마신다. 웅크리거나 모으거나 트위스트를 하는 경우에는 내쉰다. 모든 아사나의 시퀀스에는 그 흐름에 맞게 호흡이 딱 떨어지게 돼있다. 어느 한 구간에 숨이 막히거나 멈추게 된다면 다음으로 넘어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는 모든 동작을 천천히 호흡과 다시 맞춰보고 어디선가 놓친 동작이 있음을 찾아야 한다. 사실 선생님의 동작을 따라 하며 거기까지 가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스스로 하는 수련이 필요하다.
아사나의 목적을 보통의 호흡으로 편안하게 이어갈 수 있을 때까지라고 생각해보자. 한 동작에서 세 번의 호흡을 이어나갈 때 (자세만 홀딩일뿐 호흡은 언제나 평온하게 이어져야 한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안정시키는데 세 번을 다 써버리면 호흡을 하는 의미가 없다. 체력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만약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다음 동작을 따라 하기 급급하다면 차라리 유튜브를 통해 동작을 알아보고 익숙해질 때까지 스스로 수련해 보는 시간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요가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의 장점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험을 비추어 보건대 자신의 몸을 살펴보지 않고 내 호흡을 따라가지 않고 한 시간을 움직이는 것은 기력을 소진하기만 할 뿐 몸과 마음의 편안함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한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더라고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디서 호흡하는지를 알 수 있는 나만의 수련시간은 스스로 조절이라는 것을 할 줄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맞지 않는 동작은 요가원의 좋은 선생님의 터치로 수정해가면 된다.
아사나가 목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프라나야마를 잊어서는 안 된다.
호흡이 천천히 깊게 동작과 조화를 이룰 때 몸과 마음의 안정이 이루어진다.
요가를 하는 이유가 오로지 보기에 그지없이 좋은 몸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왜 호흡을 깊고 느리게 자연스럽게 아사나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가 쓸데없는 사설이 되겠다. 물론 그 목적이 나쁘다 생각하지도 않는다. 좋은 몸을 만들고 좋은 마음을 키워나가는 것도 결국은 이어지게 되어 있으니 하나라도 잡기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은 훌륭하다.
요가 안에 숨겨진 의도가 내가 생각하던것과 다르다.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왜 나는 요가를 하는 걸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것 같다. 때론 왜 나는 살아있는 걸까라는 정답 없는 고민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도 집중하는 짧은 시간이 모든 시간을 더 좋게 만들어가는 걸 보며 좀 더 진지해지게 된다. 그리서 요가하는 시간이 나는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