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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Mar 23. 2017

철학 + 과학 = 수련  

나의 소소한 요가가 바라보는 곳.

요가 지도자 과정을 시작했다. 이제 3주가 지났다. 배운 것은 요가원에 가서 복습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나는 홈요가족이다. 처음으로 일을 쉬게 되면서 가장 먼저 요가 지도자 과정을 등록하고 집에는 나만을 위한 요가 공간을 만들었다. 요가원은 다른 이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으로 다른 이의 기운을 빌어 더 멀리, 더 높게 날 수 있는 곳이라면 집에 만든 요가 공간은 나의 호흡을 가장 가깝게 느끼며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더 깊이, 더 가깝게 몸과 마음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나의 소소한 요가가 집에서 하는 혼자만의 것에서 지도자 과정을 통해 좋은 스승의 연륜과 정확한 지식이 더해져 아마추어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지도자 과정을 시작했다는 말에 사람들이 묻는다.

이제 거꾸로 서서 걷는 거 아냐? 고기도 안 먹어야지?

종교적인 거 아냐? 예전에 가르치다 불미스러운 일도 있다며, 괜찮은 곳이야?

근데 왜 해? 요즘은 필라테스가 대세 아닌가? 뭔가 좀 달라?

당연한 질문들인데 가끔 당황한다. 대답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일하면서 생긴 생각 중 하나가 모든 것은 한 문장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핵심은 멀어진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겉만 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요가가 한 문장으로 설명이 될까. 빈야사나 아쉬탕가, 아사나 등은 산스크리트어를 해석하며 현재의 의미를 찾아가면 되는데 요가 전체를 보자니 딱히 운동인지, 철학인지 애매하다. 대중들에겐 여자들이 많이 하는 몸매 가꾸는 운동이라 인식되지만 나에겐 그걸로는 부족하다.


철학, 예술, 해부학, 심리학, 종료, 운동, 치유......

한참을 많은 단어들을 나열해 본다. 다 해당되면서도 단 한가지로는 부족한 느낌이다. 한 가지 속성만을 쫓다 보면 그건 내가 원하는 요가의 모습이 아닌 다른 형태가 돼버린다.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어느 한 부분으로 깊이를 갖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므로. 다만 나의 수련은 그 요소들의 균형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을 뿐.)


요가를 통해 신체의 균형과 강함을 기르는 것은 운동, 신체적인 치유이지만 궁극적으로 마음과 영혼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명상까지 포함하면 철학, 심리학에 가깝기도 하다. 나에겐 요가의 좋은 부분은 신체의 변화 끝에 오는 마음의 평화이다. 사실 한참을 땀을 흘리며 몸을 단련하다가 마지막에 휴식을 취할 때 느껴지던 편안함은 크로스핏의 데드리프트 끝에 주저앉아 느끼는 쾌감과 별다를 바 없다. 그 다를 바 없는 요가를 특별하게 만들었던 순간이 있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 요가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조용하고 깨끗한 공간에서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와 멀리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멀어져 가며 힘도 얼마 주지 않은 몇 개의 아사나들을 할 때 느끼는 감정은 뭔가 달랐다. 아주 잠깐이지만 명상에서 느꼈던 개운함과 홀가분함이 어쩌면 요가의 수련 끝에 오는 진수가 아닌지.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오던 요가의 길이 그 끝을 만나기 위함이 아녔을까.


요가는 어느 한 분야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모든 요기가 동의하진 않을 것이다. 오래 시간 동안 축적되어온 보편적인 의미는 분명 있다. 수많은 구루, 마스터, 스승들 각자만의 고유한 해석의 여지와 자기만의 특별함으로 새로운 요가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예전의 글에도 썼듯이 언제나 변화하며 진화하는 생물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지식이 쌓아갈수록 몸의 수련이 단단해질수록 자신과 맞는 요가를 찾아가는 여정이 중요해진다.


누구나 자신만의 관점으로 요가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소소한 요가의 중심은 두 가지이다.


삶을 관통하는 신념과도 같은 철학과 몸의 관계를 이해하고 움직일 수 있는 해부학이다. 그 관계는 언뜻 별개인 듯 하지만 순환하는 개념이다. 마치 아쉬탕가의 8가지 원리가 각자의 보완하는 단계이자 진화하는 단계인처럼.


삶을 결정짓는 근본적인 차이는 마음가짐이다. 쉽게 긍정적으로 밝게 살아가라 말하지만 가끔 지치고 힘들고 괴로운 일을 외면하면서까지 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순간부터 요가를 하며 가장 많이 접한 단어는 '나'이다. 다른 이와의 소통으로 찾아가는 자아와 다르게 나의 몸으로, 나의 호흡으로, 나에게 스스로 많은 것을 물어보고 대답할 수 있는 시간이 요가하는 시간이다. 지도자 수업의 많은 시간은 선생님의 철학이야기, 아주 보편적이고 쉬운 삶의 이야기가 할애된다.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면 어디서나 들을 수 있고 스쳐 지나가기 쉬운 신념들이지만 요가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의 가르침은 마음을 움직이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특히, 끝없이 수련하며 부딪히고 도전하고 인내하는 순간들은 내가 흔하게 부딪히는 현실 속의 갈등과 다를 바가 없다. 핵심이 전진하는 것에 있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조금씩 변화하며 작은 행복들을 얻는다. 그 과정은 평범하고 소박하다. 열정에 차서 마스터가 될 거라고, 떼 돈을 벌거라고 각오를 다지며 시작해도 그 과정은 누구나 같다. 그래서 모두가 다르게 표현해도 속도가 차이가 나도 같은 것을 느끼고 공유하게 된다. 요가원에서 수련할 때의 에너지를 나눈다는 것도 그런 의미이다.


몸으로 수련하며 그렇게 많은 것들을 알아간다. 결국 몸의 수련이 마음으로 영혼으로 이어진다. 때로 집착하게 되는 아사나들은 오랜 시간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 왔다. 몸의 관계, 뼈와 근육과 근막을 이해하면서 내 몸에 맞는 원리를 이해하며 전해져 내려온 것인데 언뜻 보기에 비슷한 동작들도 시선, 발 끝, 손 끝, 골반 방향에서 차이가 있다. 왜 이 동작이 좋은 거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거지? 의문을 품기 시작한 건 아무리 노력하고 늘려봐도 너무나 아프고 힘든 동작들이 있어서였다. 분명 선생님은 아주 쉽게 하는 동작이고 유튜브의 많은 고수들이 시연하고 있는데 나는 너무나 아프고 힘들었다. 하다 보면 될 거라는 말이나, 골반이 덜 열리고, 가슴과 어깨가 굳었다는 말을 듣는다. 힘으로 누르거나 무리하여 뒤틀거나 반동을 이용해 지지하다가 근육이 놀라거나 삐끗하는 경우가 있었다. 개인 피티나 필라테스의 경우에는 어느 동작, 기구는 몸의 어느 부분을 활용하게 해 주고 강화하고 이런 설명이 따라오는데 요가의 동작들이 어느 근육으로 어떻게 쓰이는 것인지 알려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번 지도자 수업에는 항상 뼈 모형과 근육을 설명하는 이미지가 함께한다. 해부학의 원리를 통해 내 몸을 움직이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이다.


만화 속에 나오는 에너지 장풍을 나는 믿지 않는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기라거나 긍정의 에너지가 힘을 불어넣는다는 등의 눈에 보이지 않은 묘한 설명으론 항상 부족했다. 해부학을 통해 설명되어지는 요가의 원리를 알게 될 때마다 해답을 얻는 것만 같다. 의문은 있지만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과학으로 설명되어지는 순간, 지식은 수련에 도움이 된다. 요가를 초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기본은 누구나 몸으로 만들 수 있는 과학이다. 다만 그 쓰임을 알지 못하고 힘으로, 또는 유연성으로 밀어붙이는 사례들이 많아서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왜 아픈지 모르겠는 많은 부작용들은 뇌와 연결된 신경들의 작용으로 느껴지는 것이고 원인은 몸의 잘못 쓰임에 의한 것이다. 감탄사를 자아내는 동작들도 몸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동작들이고 그 세밀한 몸의 조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몸으로 알아가는 수련이다.


아사나가 잘될 때가 있다. 먼저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몸의 힘을 뺀다.  온몸의 강약을 호흡에 의지하며 뼈와 근육을 내가 알고 있는 동작의 원리대로 움직여 갈 때이다. 제자리에 있어야 할 뼈와 근육들이 때론 강한 힘에 의해 붙잡여서 움직이지 못할 때가 있다.  그 힘을 조절하는 것이 생각과 마음이다. 의도하지 않고 집중하다 나도 모르게 성공한 순간이 있다. 깜짝 놀라며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편안함이 공존하게 된다. 거기에 한 단계 나아갔다는 기쁨은 덤이다.


모든 취미생활은 나를 변화시킨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달리는 것도 몸과 마음으로 삶에 위안을 준다. 요가가 그 취미 생활에 포함되는 사람도 있고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있다. 각자 인생에서 차지하는 크기가 다를지라도 요가 안에서 내 몸을 쓰며 마음을 위로받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더 소중할 수 있도록 요가를 접하는 모든 이들의 각자의 철학을 요가를 통해 쌓아가기를. 그리고 몸의 쓰임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알고 수련을 받아서 아픔 없는 시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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