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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Apr 03. 2017

시작점, 하타요가.

요가의 뿌리,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하여.

누가 처음으로 요가를 만들었는지가 중요할까? 이 다양한 요가의 종류 중에 원조는 뭘까?

가장 오래되었다는 요가가 진짜일까? 제일 어려운 동작들로 이루어진 요가가 진짜일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수련하는 요가가 진짜일까?

수많은 질문들은 답이 없다. 이름으로 내건 요가의 종류를 모두 원조라 얘기하고 진수라 고집하지만 그 다양한 원조들 앞에서 나만을 위해 함께 수련하며 고민해주는 선생님을 찾기란 어렵다. 물론 고민을 하고자 하는 당사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할 테지만 말이다. 


요가의 종류에 따른 선호도는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지만 가르치는 선생님에 따른 영향이 더 크다. 같은 요가 안에서도 가르침에 따른 강약에 따라 때로는 종류가 다른 요가와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가의 종류를 알아가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 되면 맘음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하고 있는 요가가 무엇인지도 마냥 모른 채 수련하는 것을 주천하지 않는다. 평생 스승으로 모시며 요가에 생을 바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주변의 요가원을 어슬렁거려야만 한다. 내가 아는 지식의 크기만큼 선생님의 가르침이 어디까지가 검증된 지식이고 어디서부터가 스스로 만든 그만의 요가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선생님이 자신만의 요가를 가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몸을 움직이는 방법 하나 설명하는 것에도 선생님의 철학이 묻어날 수밖에 없기에.) 수련을 행하는 것은 나이지만 나의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을 움직이는 이는 선생님이다. 내 수련의 방향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요가의 어떤 면을 강조하는지는 알고 따라가야 한다. 때로는 맹목적인 가르침과 배타적인 지식에 의지하게 되어 다른 요가의 종류에 대해 편향된 시선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각 요가의 의미를 알고 요가원의 선생님들로부터 받아들일 것을 취사선택해야 한다. 


오랜 세월 다듬어지며 여기까지 발전되어 온 요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방대한 자료가 있다.  몸으로 수련하고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진지한 마음으로 신념을 받아들여 스스로 수련의 목표를 설정하지 않으면 그저 한두 시간을 허우적거리며 스트레칭, 땀 흘리는 운동을 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혹은 요가원에 휘둘리는 호갱님이 되는 것이다.


이전에 얘기했던 빈야사와 아쉬탕가 요가의 명확한 구분을 지어주는 것은 아쉬탕가 요가가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다. 체계적으로 많은 종류의 아사나를 시리즈로 만들어 그 순서를 지켜가는 아쉬탕가와  다양한 시퀀스를 가질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빈야사 요가는 그렇게 각자의 장점으로 대표적인 요가의 종류로 자리매김하였다. 생각해보면 빈야사와 아쉬탕가의 아나사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 아사나 자체는 비슷할지 모르나 전체적인 수련의 방법은 매우 다르며, 실제 수련을 해보면 어떻게 선생님이 가르치냐에 따라 같은 요가 안에서도 극과 극을 달리게 된다. 하타요가는 그런 면에서 두 수업들의 특별함에 버금가는 어떤 면을 찾는 게 어렵다.


하타요가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요즘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빈야사와 아쉬탕가의 모든 아사나를 활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요가의 역사를 보면 원조는 하타 요가이다. 가장 오래된 수련방법이고 모든 아사나를 다루는 광범위한 요가이다. 그래서인지 특별한 매력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게 되는 가장 무난한 요가 이기도하다. 


하타요가를 처음으로 이름 붙인 이, 그리고 그 요가를 계승한 이가 의미했던 것은 아사나(자세)만을 만드는 수련은 아니다. 12세기에 인도에서 하타라는 이름이 붙은 후(당시엔 아쉬탕가 빈야사 요가의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전이다), 19세기 중반에 서양세계에 소개되며 호흡과 함께 아사나(자세)는 고통을 줄여주는 치유법으로 소개되었다. 기본적인 몸을 단련하는 방법이 하타요가로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여 아사만을 의미하는 것처럼 소개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명상까지도 아우른다. 아쉬탕가, 빈야사의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호흡과 각각의 아사나가 하타요가와 유사한 것 바로 하타요가로부터 시작된 체계이기 때문이다. 뿌리라고 불리는 하타요가가 아직까지도 하나의 종류로 많은 이들에게 전수되는 이유는 아쉬탕가나 빈야사 혹은 다른 종류의 요가들이 가지는 특별한 시스템으로 구성되지 않아도 기본적인 아사나의 수련 방법만으로도 요가가 궁극적으로 향하고자 하는 명상, 자신과의 대화, 육체의 단단한 근본을 모두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젠틀 요가라고 생각하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따라 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며 호흡하는 시간들로 이루어진 수업도 하타요가의 다른 변형이라 봐야 할 것이다. 


한 가지의 아사나를 가르치는 방법도 선생님마다 다르다. 하타요가의 범주를 단순하게 젠틀, 이지, 힐링으로 규정해서는 안된다. 하타요가의 수련법이 다른 흐름을 가진 요가에 비해 정적이고 단순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기본적인 것에 가장 충실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정확한 자세로 안정적으로 호흡할 수 있는 것이고 땀을 적게 흘려도 마음의 안정을 찾기는 더 쉬울 수도 있다. 땀 흘리며 운동하는 것에서 오는 카타르시스와는 다른 정적인 마음의 평화, 명상과도 같은 그 효과를 결코 작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내가 지금 경험하지 못하였고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수련을 오래 할수록 거친 호흡은 안정적으로 균형을 찾아간다. 그 안에서 얻어가는 요가의 진수는 어렵고 힘든 아사나만이 주는 상은 아니다. 


하타요가의 뜻을 해와 달, 음과 양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forceful, 힘 있는 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어떤 뜻으로 받아들이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하타요가를 인도 요가의 10가지 분류로 보고 하나의 파로 생각해도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하타요가의 전해져 내려오는 정확한 정답보다는 요가원에서 소개하고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방법들이야말로 현재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진짜 하타요가의 모습이다. 그러니 하타요가가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어와 아쉬탕가 빈야사 등에 근간이 되었고, 아직까지도 하나의 이름을 갖고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기억하고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하타요가를 정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원조이며 뿌리라고 얘기하는 글들은 많았지만 뭉뚱그려서 설명되어있고 때로는 요가의 흐름을 여러 갈래로 정리하고 그중의 하나라는 식의 분류의 글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의 내리기 이전에 어차피 요가를 한국에서 하는 이상 현실에서의 하타요가를 받아들일 수 밖에는 없다. 그래서 나의 소소한 요가에서는 하타요가를 기본적인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언제든 그리고 어떤 아사나든 프라야나마와 함께 수련할 수 있는 요가, 그래서 누구에게나 열린 요가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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