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이 시작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상영관이라고 했다. 회사 입사 후 맘이 맞는 지인들이 모여서 아주 큰 극장의 중앙에서 이상한 안경을 끼고 몇백명의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봤다. 조금만 가장자리 쪽으로 자리가 배치되면 인물의 얼굴이 삐뚤어져 보인단다. 그 당시 모임의 가장 큰 형님이었던 지금의 내 짝꿍은 힘을 써서 나를 가장 가운데에 배치해줬고 너무나 큰 화면이 커서 항상 모니터 사이즈가 가장 좋았던 나에게 큰 화면은 매우 버거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감당하는 세상은 딱 적당한 사무실에 딱 적당한 몇명의 사람들이였다. 딱 내가 들어갈 정도의 바닥에 깔린 이불이 가장 아늑했다.
그래서 항상 커다란 집, 커다란 차, 높은 지위를 동경하는 이들이 신기했다. 청소하기도 귀찮고 (나는 잘 모르지만 그 정도면 사람을 쓴단다) 물건 어디다 놓았는지 항상 기억할려면 번거로울 것만 같고, 숨어있는 사람 없는지 밤이면 무서울 것이고, 기타 등등. 딱 맞는 적당한 영역은 사람간에도 공간에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너무 가까운 사람을 이제 더이상 만들고 싶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회사에서 달리기를 멈추고 게다가 실업급여까지 끓긴 천연백수가 된 지금, 그 적당함에 해당하는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다양한 장소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 새로운 카톡창이 열렸다. 언젠가는 하나둘씩 대화가 끓겨서 단짝만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여기 유라시아에서도 울리는 소식들이 단짝과도 문자나 전화를 자주 하지 않았던 나에게는 신기한 변화이다.
회사에서 만난, 혹은 대학교에서 만난 이들은 성인이 되서 만난 술친구이기도 하다. 어쩌면 같은 일에 흥분하고 속상할 수 있는 영역의 사람들이기에 술을 더 많이 마시고 더 가깝다고 믿어왔던 것일지도. 그들과의 연결고리가 두껍고 견고하다 여겼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 견고함은 여전하지만 점점 가늘어 지는게 느껴진다. 관계란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대한 노력이 중요하다. 가깝게 만나지는 사람들일 수록 그 노력은 쉬워진다. 매일 마주치던 얼굴들을 일부러 연락하고 어렵게 찾아가야 만날수 있는 일이 되었다. 어렵고 귀찮은 일이 되어가는 그 노력이 느껴지는게 슬프다가도 당연한 것임을 깨닫는다.
새로운 도시에 오자, 백수생활 과는 다른 느낌이다. 전혀 다른 도시, 아무도 한국어를 하지 않는다. 예전에 억지로 회화학원을 다니며 기억하려 했었던 영어가 입 안에서 맴돈다.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것임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러시아에서 영어를 하는 이는 호텔리어 정도이다. 짝꿍과 나, 단 둘뿐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서울이란 큰 도시에서 공부하고 강남 언저리의 회사를 맴돌았다.
동해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작한 라이딩은 지난 나의 배경을 모두 지우고 있다.
위이잉. 키를 돌리면 계기판의 동그라미를 따라 신호가 돌아간다. 한바퀴를 돌아가면 전원키를 누른다. 부르릉. 떨림이 전해진다. 아직은 두다리를 버티고 있을 필요는 없다. 사이드 바가 아직 올라가지 않았다고 계기판에서 알려준다. 두 손을 핸들에 올리고 까닥까닥 쥐어본다. 처음과는 다른 익숙한 느낌, 언젠가는 스크룡이 아닌 다른 아이를 만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오직 이 녀석만이 나와 소통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천히 사이드바를 올린다. 어설픈 손동작이 언제부터인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럼없이 저절로 작동된다.
철컥, 일단이다.
내가 보던 하늘과 산과 길, 내가 알던 사람 사이의 우정과 사랑, 그 모든 것이 며칠 사이로 다르게 느껴진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게으름과 속물근성이 달리는 순간 동안 문득 선명해졌다가 사라진다.
일자로 뻗은 길이 저 끝에서 사라진다. 양쪽으로 울창한 숲이 빽빽하다. 어느 하늘인지 모르겠지만 내 눈앞에 보이는 하늘은 한참 후에 달리게 될 하늘일 테다. 언덕을 넘으면 그 다음은 어딜까.
80, 90, 100. 시속 100km를 순식간에 넘어선다.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몸을 가볍게 고정한다. 어깨에는 힘이 점점빠진다. 가끔 동공을 흔들어 주변을 넓게 바라본다. 굳이 돌리지 않아도 내 눈앞을 가리는 방해물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커다란 지구에 나 혼자 달리고 있는 것만 같다. 바람이 불어온다. 나와 바이크를 이리저리 흔들며 지나간다. 다시 한번 무릅을 중심으로 다리에 힘을 준다. 스크룡을 꽉 껴안아본다. 나와 달려주는 네가 참 좋다고 조용히 말해본다.
여행을 떠나라는 말은 우리에게 휴식, 재충전, 즐거운, 소비 등 많은 즐거운 것들로 포장되어 있다. 이번 여행은 라이딩이다. 그냥 달려보는 것,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륙을 넘어보자. 그 시작을 넘어서자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 여행이 즐겁지만은 않다. 보이는 풍경이 아름답다해서 내 마음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더라. 나는 얼마나 작았는지, 쓸모없는 감정들과 이기심을 가진 사람이였는지, 우리는 얼마나 별거 아닌 존재인지를 깨닫는다.
아무도 나 이외에는 보지 못할 시간과 공간들이 지나간다. 이 길이 끝나면 이 시간이 사라진다.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길이 열린다. 시간을 그렇게 째각거리고 바이크 위에서 핸들에 손을 꼭 잡은 채 그 길을 지나간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시속 100km로 내달려본다. 바람이 갈라진다. 내 몸이 칼날이 되어본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데도 다시 또 앞이 나타난다.
한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난다. 쉬엄쉬엄 달리자며 시간마다 멈춰서 본다. 목적지를 앞두고 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또 다시 달릴 내일이 떠오른다. 하루를 달려보니 알겠다. 이 길에는 끝이 없다. 그리고 나는 내일도 그 다음날도 달려야 한다. 하루쯤 더 쉴수도 있고 원한다면 이 쯤에서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길은 이렇게 끝이 없는채로 나를 기다릴 것이다.
문득 왜 달려야 하는지 다시 궁금해졌다. 일분 일초 새롭게 단장하는 풍경 앞에 한 없이 감동받는 이 뜨거운 감정 때문이라면 하루 정도 느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유를 찾아헤매는 버릇은 언제부터 나를 괴롭혔던 것일까.
중학생 시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걸어서 30분이였다.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도 되는 것을 나는 항상 새벽에 일어나 걸어서 학교에 갔다. 매우 더운 여름을 제외하고는 걸어서 집으로 왔다. 혼자 걸으며 들었던 카세트 테이프가 언제 고장났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어린 시절, 자우림의 우울한 노래 가사 속에서 왜 내가 살아있는지 궁금했다. 그저 답없이 매일 궁금했다. 나는 왜 생각이라는 걸 할까. 지금 이 생각은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답을 내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 그런 질문을 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졌다.
유라시아를 달린다. 나는 왜 살아있는 걸까. 커다란 지구를 온 몸으로 느끼며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올려본다. 고작 몇 초, 이만큼의 거리는 지도상에 점으로도 찍히지가 않는다. 나는 그런 존재였다. 별 거 아닌 그냥 꼬물거리는 생명체.
내가 살아온 배경들이 끝이 없는 도로 위에서 하얗게 부서진다. 기억나지만 각인시키지 않으려 했던 과거일수록 오래도록 머무는 법이다. 애를 쓰고 지켜왔던 삶의 영역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먼지가 된다. 한껏 바람을 일으켜 날려버려도 다시금 쌓여간다.
달려야 한다. 길에 끝이 없다. 살아야 한다. 인생에도 끝이 없다.
눈에 담기지 않는 대지의 품 안에 내가 느꼈던 안락한 적당한 공간이란 없다. 이제는 그만 울타리를 부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