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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Aug 30. 2017

삶을 위한 요가

나는 요가를 왜 하는가.

회사원 시절, 나는 그저 그런 동네 요가원의 그저 그런 회원이었다. 요가 회원으로의 시간이 길어지고 다양한 선생님을 만날수록 요가에 대한 막연한 목마름이 있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이 요가  지도자 과정이었다. 그렇다고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아무리 허술한 요가원을 다녔다고 해도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았던 나의 몸과 마음이 삼백만 원과 3개월의 시간으로 획기적으로 변할 리가 없기에.  그저 내가 접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환경을 겪어보는 것, 그 이후의 요가 수련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는 것, 그 두 가지가 나의 목표였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이론적인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해외사이트를 뒤져볼수록 많은 것들을 알아갔다. 반면 막연한 것들은 더 막연해졌다. 철학인 듯, 삶의 교훈인 듯한 이야기는 하나같이 어느 자기계발서에서 본 듯한 느낌이다. 물론 다 좋은 이야기이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대가들은 수많은 요기니들이 존경하며 우러러본다. 그저 그런 요가 회원으로 보낸 나의 몇 년과는 비교도 안되게 대가들은 몇십 년 넘는 시간을 요가로 보냈다. 인생을 통해 요가라는 넓고 광활한 영역에서 자기만의 역사를 써내려 왔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론과 가르침은 충분히 검증된 것들이지만 내게 어떤 것들은 맞아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현존했던 구루에게서 지도를 받았던 몇 명의 수제자들의 가르침은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이 더해진 탓에 대부분 비슷하였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전혀 다르기도 하다.


요가는 처음엔 광대의 묘기처럼 시작되었다가 종교, 철학의 색채를 띠게 된다. 최근에 들어서 의학의 검증까지 더해지며 시스템을 갖추어갔다. 그래서 요가를 다루는 방식이 어떤 곳에서는 영혼과 기를 다루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눈으로 확인되는 아사나를 내세운다.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여기서 홍보가 가미된 비즈니스가 더해져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가져다줄 것만 같은 환상을 만들어 낸다. 오랜 시간 검증되어온 이론이나 수많은 제자들이 우러러보니 대가들에 대한 자료만으로도 요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진다.


한 가지 아사나의 정답을 찾으려 하면 무수히 많은 답 속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철학이나 삶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오래전부터 내려왔다는 가르침은 다른 입을 통해 다르게 전해지고 있다. 공통된 이야기 하나는 있다. 바로, '수련'이다. 수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요가하면 떠올리게 되는 몇몇 이미지, 아사나이기도 하다. 요가에서 등장하는 어느 단어든 복합적인 의미를 담겨 있어 해석이 다양하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같아도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달라지고 때로는 전혀 다른 이에게 배운 이들이 공통된 신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정답이 없는 요가의 세계에서 요가란 이런 거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단호하게 한 가지 가르침을 고수하는 것을 보면 맞는가 싶다가도  전혀 다른 가르침을 만나 서로 충돌하는 것을 보면 의구심이 든다. 요가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 발전돼 오고 있는데  과연 한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걸까? 몸과 마음이 다른 이들에게 하나의 이론이 맞아떨어질 수 있는 걸까?


지도자 과정에는 여러 선생님들의 다른 각도의 가르침이 존재했다. 때로는 그 가르침끼리 충돌하기도 한다. 교육을 하는 과정에서 과학적이고 해부학적인 검증을 거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각자의 몸이 다르니 해결책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답이 나오고 삶을 살아가는 철학을 이야기하다가도 매일 몸으로 수련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짓는다. 마치 두드리면 답을 얻을 것처럼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결코 하나의 답이 나온 적이 없었다. 다행히 내가 선택한 요가원의 지도자 과정에는 자신의 요가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다른 이의 요가, 수련을 배척하는 선생님은 없었다. 그러나 가르침은 선생님마다 묘하게 달랐다. 공통점은 요가를 업으로 선택해서 평생을 수련할 각오와 열정뿐. 그래서 모든 선생님들은 자신만의 수련에 자신감이 있었다. 교육은 강요가 아니었고 그 다양한 정답들 속에서 '나'의 요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었다.


지도자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나의 육체적, 시간적인 한계와 비즈니스로서의 요가원의 한계를 인지했다.  그럼에도 지도자 과정 속에 그저 그런 회원으로는 배울 수 없는 그 이상의 요가를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결국 내가 알게 된 것은 혼자서는 알아낼 수 없는 아사나를 향한 빠른 길, 그리고 바른 길이다. 또, 이미 알려져 있는 지식과 몸에 대한 이론을 스승의 입을 통해서 듣고 스승의 몸을 통해서 배웠다. 그것만으로도 앞으로의 나의 요가는 충분할까. 한편의 아쉬움의 정체를 모른 채 교육은 어느새 끝나 있었다.


교육에서 의외로 큰 비중을 차지했던 요가 철학은 아사나과 함께 할 때 책을 통해 얻어지는 것보다 더 큰 울림이 있었다.  아사나에 집중한 후의 단순해진 마음 상태 때문일까. 알면서도 와 닿지 않던 이야기들이 갑자기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마음을 건드리는 순간이 있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몸을 수련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강박관념처럼 수련을 말하게 된다.


그렇게 하루의 일부를 수련으로 보냈다. 내 몸을 수련을 위해 아끼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수련만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루를 미루면 뭔가 찜찜한 마음이었고 아무도 몰랐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에 자책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수련을 회사를 다니는 것처럼 이뤄야 하는 인생의 목표처럼 단단한 각오와 함께  매일의 숙제로 생각했던 것 아닐까.


그리고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삼 개월 동안 걸어놓은 요가라는 주문이 풀릴까 봐 요가 매트를 챙겼다. 애써 배운 것, 몸으로 익힌 것들을 어쩌면 금세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조바심 때문이었다. 여행의 시작과 동시에 매일매일 바이크로 달리고 먹고 쉬고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바이크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면 몸과 마음이 풀려버렸다.  하루에 십 분이라도 요가를 해보겠다고 시간을 내보았지만 평소의 수련 시간에 비하면 매우 짧았다.


그렇게 일주, 이주일이 지나고 휴식하는 날이면 어디든지 자리를 잡고 아쉬탕가 프라이머리 풀 시리즈를 했다. 두 시간이 흘러가고 나면 수련을 하였다는 사실에 스스로 뿌듯해졌다. 어디를 가더라도 3개월 동안의 지도자 과정이 내게 심어놓은 가장 큰 단어, 수련을 해야만 했다. 나와 함께 지도자 과정을 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요가 선생님으로 변신하고 새로운 동작을 시도하고 있었다. 모두가 시작도 목적이 달랐다. 각자의 위치에서 다르게 자신의 요가를 펼치고 있는 사이에  나는 어느 러시아의 호텔방에서 요가매트를 펼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넘어서자 피로감이 극한으로 치달았다.  어지러운 시르사나를 마친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나의 수련인데, 나의 요가인데,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 어떻게든 채워야 하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건 아닐까.


먼 타지에서 내 몸과 마음을 지탱하는 것이 요가가 돼버린 것처럼 매달리는 나를 발견하였다. 휴식보다 수련을 선택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다른 요기니의 아사나에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어떤 수련을 했는지 반성하고 있는 낯선 나를 보았다.


요가가 삶인 이들이 있다. 매일 몸의 어느 곳을 열고 조이고 하루하루 변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기쁨인 사람이 있다. 나에게도 과연 삶이 요가인 것일까. 요가의 모든 철학과 지식, 육체의 단련에 관한 것들로 내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일까.


요가 업계에서 성공하고 싶거나 어느 고수의 단계까지 이루고 싶은 목적이 생긴다면 요가를 위한 24시간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고자 하는 것이 내가 요가를 시작하게 된 이유였던가.


매일 아사나 이미지들과 무한대로 반복되는 비디오가 넘쳐나고 있다. 그중에 하나로써 살아가기를 원하는 걸까. 분명 그것은 아니다. 내가 요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어느 찰나의 위로였다. 자기 전에 되지 않는 아사나를 반복하고 몸이 아직도 열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이유는 건강한 삶에 있다. 명상을 통해 맑아진 마음을 얻어 내 삶 속에 피치 못하게 생긴 이들과의 갈등이 사라지길 바랬다. 고요한 순간을 통해  번뜩이는 창의력을 위한 머릿속의 공간이 넓어지길 바랬다. 강하고 유연한 몸으로 엄마가 될 준비, 아프지 않게 늙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 나의 요가였다.


그러나 한 방울의 땀이 더해질수록  잘못된 자세가 하나씩 고쳐지고 더 나은 아사나를  도전할수록 요가에 집착하게 된다. 집착과 끈기를 계속 불러내는 것이 요가의 한 부분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변하게 되고 그 변하는 기쁨이 다시 매트 위에 서는 동기가 된다.  동기가 강해져서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면 경쟁에서 뒤처지고 싶지 않아서 다른 이보다 빨리 도달하고 싶어서 매트 위에 서게 된다. 여행 가기 전 수련을 숙제처럼 매일매일 하던 그때, 나의 모습이다.


처음부터 선생님으로의 삶의 변신을 꿈꾸지 않았다. 혹시나 숨겨진 재능이 있을까 기대를 하며 백수의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그게 내 삶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 요가에 대한 개념이 잡히자 더 이상의 어려운 아사나에 매달릴 이유가 없어졌다. 대가들의  많은 가르침을 좀 더 알고 싶지만 절대적인 진리가 될 거라고 믿지 않는다. 내 삶의 모나고 뾰족한 어느 예리한 부분이 요가를 통해 다듬어져 스스로 상처를 내는 일이 없도록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 것,  나를 위한 시간, 현재의 삶 속에 요가가 어우러지길 바란다.


여행에서 나의 요가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어느 스승의 뒤꿈치를 쫓아가고 있는 걸까. 함께 지도자 과정을 하는 친구와 발걸음을 맞추고 싶어 하는 걸까?  하루하루 수련이 쌓여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 삶에서 수련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누구처럼 멋진 몸으로 어려운 아사나를 소화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내 마음과 몸이 그저 그대로 뻣뻣하게 멈춰 있다 해도 그게 내가 선택한 삶 속에서 어울린다면 그 이상의 요가가 필요하진 않다.


지금, 여기, 나를 위한 몸과 마음을 위한 시간. 삶을 위한 요가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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