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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May 26. 2017

머리카락이 자라듯

변화는 아주 조금씩 온다.

아침이다. 눈을 뜨자마자 어깨의 뻐근한 통증과 함께 둔해진 허벅지 근육이 존재감을 과시한다. 두 달째 요가원을 다니며 수련을 이어가다 황금연휴를 보내며 열흘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수련과 함께 근육통이 왔다. 몸이 유연해진다 거나 가볍다거나 개운하다는 말, 진심으로 내뱉은 게 언제였더라. 항상 몸의 어딘가는 뭉쳐있고 아파하고 있다.


수련은 힘들다.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때로 맹렬하게 솟구칠 때면 내 몸 안 어느 곳에 이렇게 많은 물들이 숨어있었는지 놀라게 된다. 비 맞은 듯 몸이 축축하다. 땀방울이 맺혔다가 매트 위로 떨어진다. 본래도 요가 타월을 애용했지만 요즘 들어서 타월이 없으면 매트가 아무리 길들었어도 미끄덩 거릴 수밖에 없다. 동작이야 어찌어찌해보겠는데 다른 이들의 귀에 거슬릴 것이 분명한 소리 때문에 맘이 흔들거린다. 나의 불편함보다 같은 공간에서 수련하는 이들에게 방해가 될까 걱정된다.


Salamba Sirsasana : 살람바 시르사사나 : (sah-LOM-bah shear-SHAHS-anna)
salamba = with support (sa = with, alamba = support)
sirsa = head


두 달 전, 나는 살람바 시르사사나를 하지 못했다. 요가의 왕이라고 불리는 역자 세이다. 첫 시작은 벽에 발을 차는 것부터였다. 도움을 주는 파트너 없이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거꾸로 서서 보이는 세상은 어지러웠고 넘어질까 무서웠다. 무엇보다 몸이 자꾸만 허물어졌다.


많은 아사나들은 같은 원리로 이루어진다. 중력을 받아서 발을 땅에 지지하는 아사나들을 하늘과 땅을 거꾸로 돌려보면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못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지를 모른다는 뜻이지 절대적으로 안 되는 것은 없다. 고로 서있을 수 있는 사람은 시르사사나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일주일 동안은 어깨가 매우 아팠다. 목은 돌리지 조차 못할 정도로 강한 힘을 주곤 했다. 그럼에도 매일매일 나는 알지도 못하는 방법을 몸으로 익히고자 계속해서 도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저 뭔가 성장하고 싶었다. 왜 하고 싶은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요가를 하는 내게 다음으로의 성장은 무조건 해내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이었다.


사람에게 변화를 이끌어내는 요인 중에 가장 강한 것은 성취감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까지 더해지면 더 치열해진다. 나의 소소한 요가에도 성취감이 가장 큰 동기였다. 시르사사나를 도전하는 그 두 달 동안 성취감은 나를 더 수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벽의 도움을 얻어 시르사사나를 성공한 날, 동영상을 찍었다.


계속해서 벽의 도움을 얻어 시르사사나를 해오던 어느 날, 넘어지는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넘어질 곳에 푹신한 이불을 놓고 도전했다. 그 수련은 집에서 요가원으로 이어졌다. 낯선 곳에서의 시도가 계속되었다. 어디서든 어깨를 대고 시르사사나를 시도했다. 마치 이것만이 나의 요가의 전부인 마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며 처음엔 발도 못 떼던 나는 벽에 기대어 거꾸로 섰다. 침실의 익숙한 풍경에서만 편안하게 아사나를 하다가 거실에서 시도하였고 요가원의 벽에 기대어 시도하였다. 그러다 파트너의 도움으로 시도하여 성공하기를 여러 번, 두 달이 지난 지금 나는 혼자서도 시르사사나를 여유롭게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것도 지난날에 비하면이고 몇 년이나 수련을 지속하신 분들에 비하면 아직은 후덜거린다.


요가는 도전이 아니다.

수련은 성공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사나를 바라보는 욕심은 요가를 도전하는 목표로서 바라보게 만들고 수련을 기술을 익혀 누가누가 잘하는지를 비교하게 만든다.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어 찾아온 요가 안에서 더 큰 압박에 시달리며 이것도 성공만이 길인 것처럼 달리기만 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내 스스로를 바라보기보다 더 나아 보이는 누군가를 바라본다. 앞서 개척된 길을 열심히 쫓아가는 사람에겐 오로지 남의 발자국을 밟는 일만 가능할 뿐이다. 요가 안에서 머무르는 것조차 더 앞서 나가고 더 잘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된다.


모든 행동에는 나를 움직 하게 하는 원동력, 동기가 있다. 때론 경쟁이기도 하고 스스로의 열정이기도 하다. 순수하게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은 열정이 때론 경쟁을 부추기고 당장 눈에 보이는 나를 누군가가 바라봐주기를, 이렇게 멋진 나를 다른 이들이 인정해주기를 기다린다. 아름다운 몸으로 어려운 아사나를 능숙하게 해내는 것, 날렵한 실루엣으로 뭔가 있어 보이는 프로필 사진을 바꾸는 것, 요가 안에서 빠지기 힘든 유혹이고, 동기이다.


눈에 보이는 얼굴, 몸과 보이지 않는 마음, 생각이 뒤바뀌면 어떨까?

요가원에서 고난도의 아름다운 아사나를 배우고 시연하기보다 삶과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게 될까?

오늘 하루 좀 더 후굴을 하고자 팔을 집어넣기보다 십분 더 앉아서 명상을 하게 될까?


이런저런 생각에 지금의 나를 되돌이켜 보다가도 밤이 되면 골반이 좀 더 열려서 어깨가 바르게 들어가져서 백드롭을 하게 될 날만을 기다리게 된다. 보이는 것, 매스컴에서 매번 요가에 대해 설명하며 내 머리 속에 이미 자리 잡은 수많은 아사나들이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변화가 서서히 느껴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쏟은 땀과 호흡들 하나가 모두 더 단단한 몸으로 다른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아사나만을 위한 변화를 가지고 온 게 아닌지 생각이 많아진다.


내 마음의 변화, 내 삶의 변화가 오고 있는 걸까.


요가 안에서 나는 정녕 조바심 내지 않고 있는 걸까.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과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기쁜 마음에 한 장의 사진을  SNS에 올리자마자 얼른 지워버렸다. 본디 시시콜콜히 공개를 하던 삶을 살지 않았는데 내 모습이 낯설어 졌다. 나 혼자 기뻐하며 수련을 해가는 것, 오로지 나만 아는 변화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걸까.


어깨로 물구나무를 섰을 때 정녕 기뻤다. 처음으로 등 뒤로 손가락이 마주 잡았을 때, 발가락 끝을 손가락으로 움켜쥐었을 때, 무릎을 가슴으로 붙였을 때, 요가의 아사나 안에서 나는 행복과 성공의 희열을 느꼈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내 몸의 변화를 만들기 위해 매일 아침 아쉬탕가를 수련할 것이다. 아마도 끓임 없이 그다음, 또 그다음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 다음의 끝이 어느 순간 허무해지고 왜 달려왔는지에 대한 끓임 없는 질문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 그 시간이 왔을 때 내 몸의 변화만큼 마음과 생각이 달라져 있다면 다행일 텐데.


변화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그 또한 수련의 경계에 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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