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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Oct 22. 2017

무력감과 싸우기

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뭐가 있을까.


그랬다. 직장인 시절, 잠시라도 쉴 수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미뤄왔던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손에 꼽을 수 조차 없는 수많은 버킷리스트들이 그렇게 계속 쌓여갔다. 우리는 항상 지금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끓임 없이 갈망한다.  당장 내 손에 쥐어쥐길 꿈꾸며 현실을 벗어나는 상상을 한다.


백수가 된 지 곧 일 년이다. 실업급여를 받으며 열심히 재취업을 위한 또 다른 공부를 한 것도 이미 몇 달 전의 일이 되었다. 긴 여행을 계획한 대로 안전하게 다녀왔다. 버킷리스트가 하나씩 지워졌다. 이룰 수 없을 꺼라 믿어왔던 것들은 일을 그만둠과 동시에 실현 가능한 일이 되었다. 안락한 직장과 불편한 사회인 생활이 동시에 끝이 났다. 하고 싶은 일만 죽어라 해도 되는 시간들, 그리고 현실을 등질 수 있는 최소한의 기간.  마치 아직 소인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다고 외치는 외로운 장수가 된 심정으로 외쳐본다.


아직 내겐 두 달의 시간이 남아있다.


세상에서 제일 쉬워 보이던 쉬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 단 꿈만 꿀 수 있을 거란 기대와 달리 많은 즐거움 뒤에 도사리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주변의 걱정과 스스로의 자괴감을 외면하며 오로지 긍정의 신만을 외치다가도 문득 멍해진다. 쉬는 것이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웠다니. 이걸 깨닫기 위해 쉬었던 것일까. 삼십 년 넘게 살았지만 해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일은 아직도 너무 많다.


어느 순간부터 그 불안함이 동반자가 되어 무덤덤해졌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던 지난 9년간의 시간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침잠이 늘어났다. 쓰는 돈의 무서움을 잊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하루를 성실하게 소비하고 있다. 아직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에 모르는 일 투성이지만 요즘 들어 한 가지만은 확신이 섰다. 뭐든지 소심하게 할바엔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과 기왕 소비를 할 것이라면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씩 갉아먹는다고 끝이 없는 게 아니다. 아주 조금씩 달라지는 통장의 잔고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 그뤠잇과 스투피트로  모든 소비를 정리하는 어느 개그맨의 판단에 따르면 나의 일상은 모두 스투피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장이 바닥을 칠 때쯤, 다시 일을 하면 된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은 걱정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양 손에 쥐지도 못할 만큼을 기대하며 티끌을 모으곤 한다. 그 티끌이 태산이 될 때쯤  젊음도 열정도 그리고 인생도 끝이 날지도 모른다. 인생이 길다고 늙은이가 될 순간을 걱정하며 젊은 나를 희생하고 싶지 않다. 다르게 판단하는 이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정답은 각자 알아서 찾는 것이다.


나의 백수 생활의 작은 굴곡들이 이어지고 있다. 어느 순간 무지하게 행복했다가도 불안함이 밀려오고, 다시 한번 힘을 내서 불태우는 일상이 반복된다.  처음으로 내 인생에 커다란 두려움이 없음을 깨닫는다. 무난한 삶의 대가가 철없는 실직자의 무계획으로 이어진다. 고작 두 달이 남은 지금, 나는 왜 내가 사회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사회로 돌아가 다시 돈을 벌고 소비하고 또 다른 직장인이 되는 것.


그 변화의 문턱에서 나는 서성이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쉬는 동안 나는 치유가 되었지만 사회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나의 변화는 오직 한 사람의 삶 안에서 일어날 뿐이다. 세상은, 사회는 여전히 불합리적이고 이중적이고 사람들은 치사하고 이기적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날들을 견디는 역치가 높아졌다. 아마도 다시 직장을 잡는다면 9년의 두배, 이십 년을 버틸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단꿈을 꿨노라고 이제 돌아가서 다시 제 역할을 하면 된다고.


사회가 조금은 변했다는 희망적인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정말 변했나?


최근에 시작한 어느 오락프로그램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에서 나는 멍해졌다. 변한 게 아니라 더 복잡하게 사기 치는 느낌이다. 취지는 독립영화를 하는 이들을 응원하기 위함이라는데 작가와 배우에게 구걸을 하며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우를 약속하지 못하고 오로지 열정 페이를 강요한다. 그게 버젓이 자막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며 뜨악했다. 노동에 대한 대가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함께 고민하자고 하면서도 막상 터무니없는 예산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작업을 해나간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조금 더 고단수가 되었을 뿐이다.


백수의 절박함을 아는 사람들이 퇴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대박신화와 새 삶에 대한 판타지를 판다.  

열정 페이를 강요받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취지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참여를 강요한다.

차별을 받았던 사람들이 더 집요하게 작은 차이를 크게 부풀려 차별한다.


행복한 백수를 벗어나려면 다시 세상으로 뛰어들어야만 한다. 어쩔 수 없다. 나 하나 대기업 때려치우고 나온다고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회 속에 묻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돈, 지위, 권력이라 불리는 것과 비슷한 어떤 힘을 가졌다면 모를까.


지금 매우 행복하고 풍족하다. 백수를 선택한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당한 거 너도 한번 당해봐라의 마음을 조금 담아 더 많은 직장인들이 백수가 되어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가 당면한 노동의 현실, 허울만 좋은 대기업과 극악무도한 노동착취, 이 두 상황뿐인 극단적 현실을 모두가 한마음으로 해결할 수 있다. 거대한 현실 앞에 한 명의 백수는 무력하다. 공감을 얻지 못한 백수의 목소리는 그저 능력 없는 자들의 불만으로 치부될 뿐이다.


능력 없는 자를 만들어내는 건 능력 있는 누군가를 끓임 없이 만들어내는 비교하고 경쟁하는 사회이다. 능력 없는 이를 없애려면 모두가 한 번쯤은 무력한 낙오자의 심정으로 백수가 되어봐야 한다.  나 같은 한 명의 백수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기에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소망한다.


모두가 백수가 되는 그 날을.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도 산을 이루는 건 꼭대기의 한 줌의 흙이 아니라 밑에 깔린 흙더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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