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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작가 Oct 31. 2022

내일은 모르니까, 오늘 사랑할게.

평소와 다르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의 표정이 어둡다. "연아야, 손 씻고 와. 고구마 먹자." 아이는 시큰둥하게 자기 방을 흘깃 보더니 책가방을 내려놓고 이내 다시 문을 열고 나갔다. 놀라 뒤따라나가니 집 앞 벤치에서 아이는 책을 펼쳤다. "나 여기서 책 읽다가 들어갈게." 귀찮은 듯 뱉어내는 말에 잠시 멈칫했다.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아니면 동생 친구들이 잔뜩 놀러 와 있어서 기분이 상했나.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일이 있는 건가. 아이에게 꼬치꼬치 물어볼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바꿨다. 책을 한 권 챙겨 밖으로 나갔다. "엄마랑 요 앞에 카페 갈까? 너무 시끄러웠던 참이야." 아이는 나의 의중을 살피듯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법 큰 아이의 손을 잡고 집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따뜻한 커피와 핫초코 두 잔을 시켜놓고 책을 펼쳤다. 우리는 별말 없이 책을 읽었다. 사라락, 사라락,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아이에게 은근슬쩍 말을 걸어본다."연아야, 무화과는 열매가 꽃 이래." 아이는 금세 흥미를 보였다. "정말? 그 먹는 게 꽃이라고? 무화과 꽃말이 뭔데?" 그런 걸 내가 알리가 없지 않나. 대화의 포문이 열렸다. 검색창에 무화과 꽃말을 쳐본다. "무화과 꽃말은 다산, 풍요한 결실, 열심이래." "다산이 뭔데?" "엄마처럼 아이를 많이 낳은 거." "엄마는 무화과 같은 사람이구나?" "엑, 싫은데 무화과는 맛이 없잖아." "나도, 맛이 없더라." 시답잖은 대화가 오가는 도중 별 일 아니라는 듯 툭 묻는다. "이제 기분이 좀 풀렸어?" 아이는 배시시 웃는다. "됐다, 그럼. 집에 갈까?"


아이를 셋이나 낳았지만 첫째에게 나는 늘 초보 엄마다. 그 아이에겐 모든 게 처음이니까. 한때는 아이의 모든 게 궁금했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든 내가 해결해주리라 했다. 이 작은 아이를 세상에 내놓았으니 아이의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조금씩 엇나갔다. 아이는 나의 걱정을 잔소리로 들었고 때로는 부담스러워했다. 11살, 아이만의 세상이 생겼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이는 항상 내 생각보다 빨리 컸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자기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문 날. 어떻게든 그 이유를 들으려고 하기보다 어떤 이유든지 너의 슬픈 마음을 엄마가 위로해, 정도의 마음을 전한다. 올 때 보다 편안해 보이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다행히 그 마음이 전달된 것 같다. 아직은 나보다 작은 손이 내 손을 꼭 잡는다.


"엄마, 아까 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는데 화 안 냈어?"

내심 마음에 걸렸는지 아이가 슬며시 묻는다.

"엄마도 그럴 때 있거든. 속상할 때 아무도 말 걸지 않았으면 좋겠을 때 그럴 때가 있는데 아까 네 표정이 딱 그래 보이더라고. 이해가 됐어.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이해하려고."


평소 같았으면 아이는 대번에 나한테 핀잔을 들었을 거다. 요즘 들어 아이는 자주 까칠한 말을 사용했고 나는 아이의 예의 없는 태도에 여러 번 지적을 했었다. 아이는 궁금해했지만 나는 그저 빙긋 웃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슬픔이 가득 흐른다. 과연 이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맞는 건가, 믿기지 않는 현실이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사고였다. 아직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거린다. 다른 건 모르겠다. 아직은 그 작디작은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린 꽃들을 위해 애도할 뿐이다. 친구가, 연인이, 가족이 내 곁에서 쓰러지는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봐야 했던 상처 입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용돈까지 쥐어주며 재밌게 놀다 오라고 인사를 나눴을 황망한 그 부모를 위해 함께 아파할 뿐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뿐이다.


한 글자 남기는 것도 어려워 몇 번이고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주먹을 쥐었다 풀며 글을 쓴다. 그런 마음이었다. 종일 그렇게 가라앉은 날이었다.


우리는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에는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 내가 모든 위험을 통제할 수도 없고, 오도 가도 못하게 빗장을 걸어 둘 수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별일 없길 바라며 살 뿐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일 후회할 일은 오늘 하지 말자고. 오늘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고. 별 거 아닌 일로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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