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둘의 수유를 꽤 오랜 시간 했던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은 별로 없었다. 임신과 수유를 반복했기에 몇 년간 예쁜 옷을 입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임부복 매장이 아닌 이런 일반 옷을 파는 매장에서는 더욱이 그랬다. 원피스나 니트류는 아예 입을 수 없고, 면티셔츠 정도가 내가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옷 가게를 쉬이 지나가질 못했다.
며칠 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사에서 혼자 아줌마 같은 모습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입지도 못할 옷들 앞에서 한참을 서성일 때, 나의 주저함을 느낀 점원이 이런저런 옷들을 추천한다. "제가 수유 때문에 옷 입는 것이 좀 불편해서요..." 나의 중얼거림에 직원은 환히 웃으며 말한다. "어머, 손님 전혀 아기 엄마 같지 않으세요. 너무 동안이신데요?" 직원의 말에 만지작 거리던 손에 조금 용기가 생긴다. 결국 원피스랑 스키니 바지, 니트 같은 것을 사 오고야 말았다. 사긴 했는데 약속 당일까지도 뭘 입을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꽃무늬가 화사하게 프린팅 된 원피스를 입고 외출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유가 돌아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원피스가 나를 옥죄여 왔다. 나는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닌 모양새로 친구들과의 시간을 버텼다. 집에 오자마자 벗어젖힌 그 옷은 그렇게 몇 년간 옷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다가 사라졌다. 함께 샀던 바지와 니트도 마찬가지였겠지.
그 일이 있은 후로도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가듯 나는 그 옷가게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고객님이 피부가 하얘서 이 색깔이 너무 잘 어울려요.", "아니, 요즘 엄마들은 정말 자기 관리를 잘하는 것 같아요."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진심인 것 같아서 나는 그곳을 그리도 찾았다. 아이를 키우며 끝도 없이 떨어지는 자존감을 살려준 옷가게 직원의 칭찬 한마디를 사러 나는 입지도 못하는 옷들을 그렇게 끝도 없이 사들였다. 장사 수완이 좋았던 직원을 욕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그저 여자로서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서 옷가게를 기웃거리던 어린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저리다.
소비라는 것이 온전히 필요에 의해하는 때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를테면, 음... 한참 생각을 해도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꼭 필요한 소비가 떠오르지 않는다. 냉장고엔 얼린 고등어와 포항초, 계란 몇 알도 있고 깍두기며 김장김치도 가득하다. 과일도 몇 가지 있으니 아이들 간식을 사러 나갈 필요가 없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지만 작년에 샀던 겨울 코트도 있고, 세탁소에 맡겨둔 오리털 잠바도 있다. 이미 봐야 하는 책은 넘쳐나고, 기분전환을 위한 커피 한잔 정도랄까. 그 또한 코로나 2단계로 테이크아웃을 해야 한다고 하니, 나는 집에서 카누 한 잔 타서 이렇게 글을 쓰는 걸로 만족하련다.
소비라 함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물자 또는 용역을 이용하거나 소모하는 일이라고 한다. 여기서 이 욕구라는 것이 중요한 키워드인데, 우리의 소비는 대체로 남을 위할 때가 많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나의 행복이 아닌 타인에 의한 욕구를 채우기 위함이다. 미디어에서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게 얼마나 편리한 줄 알아? 이게 얼마나 시간을 단축시켜 주는 줄 알아? 이 정도는 써줘야지 하는 식의 부추김이 우리의 소비 욕구를 충동질한다.
게다가 요즘은 온라인에 집을 지어야 한다는 김미경 강사의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집에 있는 엄마들이 SNS를 시작했다. 온라인에 내 집을 세워야 하는데 그렇게 진입한 세상에서 자꾸 남의 집을 쳐다보기 바쁘다. 저 집은 여행을 갔네, 명품을 샀네, 남편이 선물을 사줬네,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움직이니 못하니 집을 꾸미고 가꾸는 일상마저 넋 놓고 구경을 하다가 우리 집 꼴을 본다. 아, 금방 죽일 테지만 나도 화분이라도 하나 갖다 놔야 할 것 같다. 뭐 하나라도 검색하기 시작하면 똑똑한 sns들은 파생된 광고를 수없이 띄워준다.
내가 아이 둘과 끊임없이 칭찬을 사러 다니던 시절, 그 고리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 내가 하수처리장에서 살게 되었을 때였다. 입 발린 칭찬만으로 도저히 그 커다란 결핍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혼 전에 샀던 명품 가방을 들고 모임에 참석했던 날, 자격지심이었는지 실제로 그랬는지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지만 "어디 살아요? 어디로 이사 왔어요?" 질문 하나에 나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명품 가방을 쥐고 어디에 이사 왔는지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나 스스로가 이 상황에 발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라. 내가 뭔가를 걸치고 있다고 한들 그 가치로 보이기나 할까, 그런 마음이 든 순간 나는 남들에게 있어 보이는 노력을 내려놨다. 아니 포기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그러고 나니 자유로워졌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소비의 발악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첫 번째 글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지독하게 아껴 쓰기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살면서 어느 정도의 소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비의 기쁨을 누릴 자유도 있다. 그런데 그 소비의 주체가 '나'인가? 를 꼭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얼마 전 내가 참여하고 있는 단톡 방에서 필립스의 에어* 바람이 불었다. 그걸 하면 미용실에 간 효과를 주기도 하고, 머리를 잘 말려주기도 하고...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꼭 에어*만이 머리를 빨리 말려줄까? 우리 집 드라이기는 미용실에서 쓰는 8만 원짜리인데(이것도 당시에 비싸다며 샀는데) 세 딸의 머리와 유난히 긴 내 머리까지 잘 말려주고 있다. 100만 원 가까이하는 드라이기의 필요성이 정말, 나를 위한 소비일까. (누구에게는 간절하게 나를 위한 소비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를 위한 소비인지만 잘 파악해도 우리의 소비는 반절로 줄어들 것이고, 우리의 삶은 굉장히 심플해질 것이다. 하루 종일 쇼핑을 위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 시간을 벌 수 있음은 물론이다. 소비, 자본주의를 살아가면서 이것을 끊고 살 수는 없다. 그렇기에 현명한 소비에 대한 고민은 아무리 많이 해도 과하지 않다. 소비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내가 소비를 마음껏 할 때는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을 때이다. 살아보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때때로 사람의 마음을 돈으로 살 수 있는 때가 있더라. 그 큰 마음을 이 작은 돈으로 살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투자하겠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소비를 하고자 한다? 그것엔 늘 의아함이 든다. 돈으로 내 가치를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졸부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