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잇, 때려치워! 돈, 그까짓 거 없으면 어때?
에잇, 때려치워! 돈, 그까짓 거 없으면 어때?
“진영아, 여기 급여가 180만 원이래. 그래도 넣어 볼까?”
“한 명 밖에 안 뽑는데 설마 되겠어? 그냥 넣어봐.”
우리가 채용 공고를 보며 우스갯소리를 하던 곳에서 최종 합격을 알렸다. 가고는 싶지만 가장으로서의 미안한 마음에 선뜻 말을 잇지 못하는 신랑에게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가보자고 말했다.
“나는 아직 퇴사를 한 것도 아니고, 다른 건설 회사로 이직을 할 수도 있어. 잘 생각해봐.”
“에잇, 때려치워! 돈, 그까짓 거 없으면 어때? 안 굶어 죽어. 가자!!!!”
신랑이 이직을 한 첫 달은 생활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매일 흙을 잔뜩 묻히고 다니던 신랑이 멀끔한 옷을 입고 출퇴근을 시작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마음은 힘들었겠지만 어쨌든 대체로 편안한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주말을 이틀이나 쉰 다는 것에 환호했다. 그 한 달 동안 이렇게 사는 게 진짜 사는 거지! 축배를 들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진영아, 혹시 통장 확인했어?”
출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신랑에게 전화가 왔다.
“아! 오늘 월급 들어오는 날이지? 아직 못했어.”
“하, 나 여기 계속 다녀야 할지 모르겠다.”
“왜? 생각보다 더 조금 나왔어?”
“내가 이거 벌려고 대학원까지 나왔나 싶다.”
“에이, 갑자기 무슨 이런 약한 소리야? 퇴근하고 빨리 와요.”
신랑의 축 처진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의기소침한 목소리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통장을 확인하고는 나도 놀라고 말았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 회사는 공무원 급여 체계를 따르고 있었다. 신랑과 찾아보면서 기본급에 수당이 붙어 나오니까 최소 얼마쯤은 나오겠다며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통장에 찍힌 금액은 이전에 받았던 급여의 반 토막이었다. 아니, 그보다 적으면 적었지, 많지 않은 금액이었다. 세상에. 때려치워! 돈, 그까짓 거 없으면 어때?를 호기롭게 외쳤던 내 모습은 점점 작아졌다. 예상도 했고,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찍힌 돈의 액수를 보니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전에는 귀담아듣지 않았던 주위 이웃들의 이야기가 귓가에 울렸다.
주말부부는 전생의 복을 타고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거야.
“신랑이 돈은 많이 벌어오잖아. 애 크면 그게 최고야. 일찍 안 들어오는 게 더 좋아. 밥도 안 해도 되고 얼마나 좋냐? 지금 조금만 버텨.”
신랑의 부재로 힘들어하는 나에게, 아이를 좀 키워놓은 이웃들은 말했었다. 애가 컸다면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내가 잠깐의 힘듦을 견디지 못해서 이런 중차대한 실수를 저질렀단 말인가? 신랑이 건강을 잃어가는 것도, 두 아이를 홀로 키우며 힘들어하는 나도, 우리가 사랑했던 반짝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주 잠깐의 희생만 하면 다 해결이 되는 것일까? 망연자실 한참을 급여가 찍한 모니터를 바라보던 나는 지갑을 들고 나섰다.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하원 하며 정육점에 들렀다.
“얘들아, 오늘은 삼겹살 파티야! 케이크도 살 거야.”
“와!!!!! 케이크! 케이크! 초콜릿 케이크!”
“엄마, 연아 생일이야?”
“아니, 오늘은 아무 생일은 아니고, 아빠를 축하해 주는 날이야.”
아직 5살, 3살인 아이들에게 오늘의 의미를 이해시킬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오늘은 기쁘고 축하할 날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처음으로 인생의 방향을 우리의 손으로 바꿔 본 날이었다. 어쩌면 힘들지도 모를 고난의 길의 시작일지라도 함께 이겨내자는 각오였다. 신랑이 한 달간 일할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비로소 급여가 나온 오늘, 우리는 진정한 새로운 출발을 했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가 집에 돌아왔다. 아이들과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했다.(고 하지만 숨어있지 못하고 아빠를 향해 뛰쳐나갔다.) 음악을 틀고. 케이크에 초를 붙이고, 후- 하고 부는 순간 눈물이 찔끔 났다. “시작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케이크를 먹은 기억, 신나는 노래에 아이들과 춤을 추며 놀았던 우리, 그렇게 신랑의 새로운 출발을, 우리 가족의 또 다른 시작을 기념하였다. 아직도 영화처럼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날의 기억은, 무모했지만 아름다웠다.
불안한 마음과 설레임까지. 포기한 만큼 넌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또 다른 길을 가야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를. 새로운 하늘 아래 서 있을 너 웃을 수 있도록.
(마이 앤트 메리, 공항 가는 길)
아이들이 잠든 밤, 늦게까지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신랑은 오늘 아침의 당황스러움, 가장으로서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었나 하는 자책,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해야겠다는 약간의 분노 같은 감정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은 괜찮겠어?라는 질문이었다. 이런 결정을 하고 난 후부터 신랑은 끊임없이 나에게 물었다. “괜찮겠어?” 일이 편해지고, 심적으로 편해진 자신과 달리 실제로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 내가 괜찮은지, 자신이 이기적으로 군 건 아닌지, 그런 마음이 신랑을 힘들게 했던 것이다.
“나도 사실 오늘 조금 놀랐어. 우리 몰랐던 건 아니잖아. 그런데도 설마? 했던 금액이 찍히니까 조금 걱정이 되더라고. 이걸로 잘 꾸리고 살아야 할 텐데. 그런데 오빠, 결혼하고 5년 동안 나는 정말 풍족하게 잘 살았어. 오빠도 알다시피 나는 직장을 다닐 때도 용돈 30만 원으로 살았잖아. 그걸로 어떻게 살았겠어? 그래서 데이트하다가도 막 과외하러 가고 그랬잖아. 그때 생각하면 지난 5년은 오빠가 벌어다 준 돈으로 내가 사고 싶은 것 사고, 먹고 싶은 것 먹으면서 참 편하게 살았어. 나는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오빠가 만들어 준 울타리가 너무 든든했기 때문이야. 내가 항상 고맙다고 말하잖아.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하나도 안 고마워지더라고. 힘들어하는 게 보이는데도 안 보고 싶더라고.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오빠는 늘 나한테 고마운 사람인데 내가 힘든 것이 먼저니까. 그래서 이제는 좀 사람답게 살고 싶어. 고마움도 표현하면서."
그랬다. 아무리 힘들다고, 이 독박 육아 대체 뭐냐고,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냐고 불평했지만 난 결혼 전의 시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뭐든 수용해 주는, 만사 OK 신랑을 만나 내가 원하는 대로 지냈다. 그 사이에 귀여운 딸 둘이 태어났다. 옹졸하고 이기적인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시켜 준 귀한 선물이었다. 이 힘이 무기력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내가 여기까지 오게 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가족”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함께 소통하고 사랑하며 지내는 것, 힘이 들 때 알아봐 주고 손 내밀어 주는 것. 결핍이 많았던 나에게 이것들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아마도 그랬기에 나는 이 선택을 남들보다 조금 쉽게 했을지 모르겠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돈은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부모님의 고생을 눈앞에서 보며 컸다. 돈 때문에 싸우고, 깨지고, 우는 모습을 보며 컸다. 에잇 그까짓 돈, 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부모님의 삶을 보며 깨달은 것은 돈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 가족을 기민하게 눈치채고 돌봐줘야 하는 것도 가족이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딸로서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럴만한 힘도 없었고 의지가 없었다. 그저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지만 내가 꾸린 가정에서 만큼은 할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힘들어하는 남편을, 그리고 나를 구하고 싶었다. 그렇게 내린 결정이었기에 후회하지 않았다. 그동안 누리던 것을 조금 내려놓는 것이면 충분했다. 나는 풍족한 삶에 익숙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쯤은 자신이 있었다. 돈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지더라. (웃음)
"내가 원래 한 생활력 하는 여자 자나. 알뜰하게 살면 되고, 안되면 당장 나가 돈도 벌 수 있어. 능력은 있지만 감추고 살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자. 우리는 잘 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