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끝나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며 방구석에서 열심히 카트라이더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뭐 하고 있노!” 경상도 사투리를 진하게 쓰시는 담임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마치 내가 너의 폐인 생활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잔뜩 웃음을 머금은 것 같은 목소리의 선생님은 “내일부터 우리 집 애들이나 가르쳐라!”하고 전화를 뚝 끊으셨다.
졸지에 백수에서 시간당 15,000원의 근로자가 될 기회였으니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선생님의 아이들은 예의도 바르고, 공부도 열심이었다. 친구처럼 때론 언니처럼, 그 아이들을 만났다. 집에서 꽤 먼 거리였지만 오고 가는 길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처음으로 열심히 공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입학 후엔 몸값이 훌쩍 뛰었고 꽤 많은 수업을 하게 되었으나, 수업이 늘어날수록 가르치는 기쁨보다는 또래에 비해 꽤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자부심만 남았다. 어느 순간 아이들의 머릿수가 돈으로 환산되었다. 보람이나 성취는 예전에 사라졌다. 수많은 아이의 시험 준비를 하느라 내 시험은 망쳤고, 능력 있는 선생님이 됨과 동시에 학교에서는 문제 학생이 되었다.
맹목적으로 돈만 좇을 때, 인생은 이렇게 꼬이는구나. 자잘한 돈에 취해서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잃어버렸구나.
나는 세 아이의 엄마이면서 어쩌다 보니 N 잡러가 되었다. 육아와 엄마 성장에 대한 책을 썼고, 독서와 쓰기에 관련된 모임을 진행하고, 엄마들의 SNS 활용법에 대해 알려준다. 모두 의도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던 엄마가 하나씩 하나씩 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하다 보니 이렇게 일이 늘어났다.
나는 아직 사업가도, 강사도 아니다. 그렇다고 작가라고 말하기에도 부족하다. 단지 좋아하는 글을 쓰고, 나와 비슷한 엄마들에게 “이거 해보니 너무 좋아, 같이 해!”라고 말하는 정도의, 딱 그 정도의 ‘넛지’를 하는 사람일 뿐이다.
누군가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수익화에 목적을 두거나 많은 사람을 모객 하지 않는 이유는 어릴 때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다. 지금은 돈을 벌려고 애쓰는 시간이 아니라 나의 실력을 쌓아야 하는 시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저 조금 일찍 시작한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일임을 안다. 20대의 나는 작은 것에 눈이 멀어 큰 것을 놓쳤지만 마흔을 앞둔 나는 좀 더 현명하게, 이 시간의 의미를 찾아간다.
흔히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이들이 버는 돈에는 “마음”이 담겨있다. 사람들은 간편 결제 서비스 시대에 계좌이체라는 수고를 보태면서까지 그들에게 물건이든 지식이든, 뭔가를 산다. 그를 응원하는 마음, 그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그를 궁금해하는 마음 같은 것을 담아서 말이다.
그 돈이 꼭 그들의 실력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매력과는 동일시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매력의 힘은 어디까지일까. 매력의 기간은 언제까지일까. 그 돈이 영원히 나를 따르리라는 것은 오만이고 착각이다. 결국 해야 하는 것은 그 마음에 상응하는 실력을 키우는 일, 여전히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닐까.
나도 물론 돈 많이 벌고 싶고, 돈 좋아한다. 가끔 로또도 사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지금 내가 버는 돈은 일종의 마음이 담긴 돈임을 알기에 맹목적으로 달려들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엄마인 나에게 흐르는 돈은 호감이 가득한, 나를 지지하는 돈이다. 그것은 ‘그저 평범한’에서 만족하고 머무르지 말고, 나와 같은 엄마들을 도울 힘을 어서 기르라는 독려이다. 내가 이 일을 지속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읽고, 쓰고, 사유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애를 쓴다.
당장은 내가 좀 어떻게 하면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마음을 품은 돈은 내 마음도 알아본다. 있어도 되는 곳인지 엮이기 전에 빨리 도망쳐야 할 곳인지 스스로 판단할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돈의 진짜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실력에 비례하는 돈을 벌 때까지 꾸준히 버티고 쌓아가는 시간을 보내는 사람만이, 결국 큰 이익을 얻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