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기보다는 묻혀있는 것을 선호하고, 많은 말을 하기보다 듣는 편이 훨씬 편한 사람. 있는 듯 없는, 자세히 살펴봐야 존재를 알아차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스스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비 오고 난 뒤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지렁이처럼. 아, 스스로에게 지렁이는 심한가. 어쨌든 밟히지도 않았는데 꿈틀거린 건 SNS 때문이었다.
누군가 나를 알아봐 줬으면 하는 마음? 아니야. 내가 그런 생각을 가졌을 리가 없지! 무색무취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면서도 아무도 나를 몰랐으면 좋겠다는 이중적인 마음. 그 마음으로 시작한 SNS는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SNS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공개 글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공개적으로 쓰는 글엔 객관적 정보만 있거나, 누구에게나 공감받을 법한 착한 글만 써졌다. 책을 읽던, 음식점을 방문하던 글을 쓰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훑어보게 되었다. 혹시나 나 혼자 방향이 다른 글을 쓰게 될까 봐. 공격당할 만한 의견은 내 안에 넣어두고 적당하게 비슷한 의견을 적어 넣었다. 온라인 속의 나는 현실의 나와 별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날도 아주 착한 글을 썼던 참이었다. 부부 관계가 좋아지고, 셋째가 찾아왔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글을 올리고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댓글 하나가 달렸다. “오빠나 남동생이 일도 안 하고 애 줄줄이 낳고 혼자 즐거워하는 여자랑 산다면 걱정될 거 같아요.”
일하지 않고 집에서 애나 보면서 셋째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내가 참 한심하다는 뉘앙스의 글을 본 순간, 온 힘을 다해 주먹을 쥔 상태로 가만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덜덜 떨리는 손을 멈출 방법을 알지 못해서였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한참을 돌려서 누구에게나 공감받을 이야기만 한다고 해도, 누구에게는 아니꼬운 베짱이 같은 여자의 삶일 뿐이구나. 난생처음 받아 본 악플에 나는 잠시 갸우뚱했다. 작정하고 꼽게 볼 사람들은 내가 뭘 해도 그렇게 반응할 것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갑자기 날아온 작은 돌멩이는 현실과 다름없이 온라인 세상에서도 쓰고 있던 가면을 깨뜨렸다. 더는 비공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글을 참고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의 시달림이 싫어서 입을 다물고 눈치만 보던 나는, 현실의 나를 모르는 이곳에서 만큼은 착한 척은 그만하고 내 생각이란 걸 말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꿈틀거리던 욕망의 발화, 악플러 한 사람을 만난 쾌거였다.
우리는 삶에서 다양한 사회적 가면을 쓴다. 엄마도 되었다가 딸도 되었다가 며느리도 되었다가 학부모도 되고 회사원도 된다. 그 모든 것이 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은 나를 이루고 있는 껍데기이다. 내가 현실에서도 SNS에서도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신경 쓰고, 눈치 보고, 내 주장을 하지 못했던 것은 모두 ‘무엇’, ‘무엇’으로 규정되어 있는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평범”이라는 말 안에 숨어있기를 바라는 나의 사회적 가면 때문이었다.
나에게 뒤집어 씌워진 본질을 하나씩 벗어내고 어떠한 규정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나에게는 단지 세 가지만이 남게 된다. 그것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규정되지 않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실존하는 존재다.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조금씩 균열이 생긴 수줍은 가면은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명제 앞에서 완전히 깨졌다. 그동안 시도해보지 못한 자유로움을 누리고 싶어졌다. 마치 여행자처럼,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조차 웅크릴 이유가 뭐란 말이야!’
온라인 세계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여행지이다. 이곳에서의 나는 또렷하게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사람, 다른 사람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 사람, 무엇이든 겁내지 않고 YES를 외치는 사람. 도전적인 내향인. 그렇게 나를 재정의하고 나니 이곳은 현실과 분리된 새로운 세계가 되었다. 40년 가까이 억눌려 있던 온갖 것들을 꺼내 보는 도전의 장이었다.
소신이 담긴 글을 적는 것도,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하는 것도 무엇보다 혼자 속으로 읊조리던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뻔뻔하게 부르기 시작한 것, 심지어 그런 영상을 여기저기 SNS에 올리기 시작한 것, 이거야 말로 진정한 미친 짓이었다. 오프라인 세계의 나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렵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얼굴이 시뻘개 질만큼 부끄럽기도 했다.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할 만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건 현실의 나와 온라인의 나를 분리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현실의 곽진영은 할 수 없지만 나날은 할 수 있다고 주문을 걸었다. 정말 지금, 이 순간만 사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나를 두려움 앞에 세웠다.
그렇게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곽진영으로 살아온 시간보다 나날로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았던 2년이 지나고 알게 된 한 가지는 온라인에서 새롭게 설정한 내가 현실을 살고 있는 나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이다. 아니다. 그저 온라인 세상 속 캐릭터처럼, 낯선 세상의 여행자처럼 자유롭게 본성대로 움직이게 내버려 둔 가상의 내가, 사실은 진짜 나였다는 것을. 오랫동안 사회적 가면 안에 짓눌려있던 본캐의 부활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느새 곽진영은 나날처럼, 나날은 곽진영처럼 완전히 분리되었던 둘은 하나가 되었다.
내가 계속 SNS를 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것이 전부다. SNS라는 도구를 제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자신’이 될 수 있어서. 짓눌려있던 욕망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고, 비로소 온 가면을 벗어버린 민낯의 나를 만날 수 있어서. 그러니 나의 민낯을 보기 위한 도전을 해 봄이 어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