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나는 살던 집에서 4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계약 기간이 다 된 것도, 집에 큰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400m 앞으로 나온다고 엄청난 편리함을 누리게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사한 이유는 이사 온 집의 매력 때문이었다. 집 앞에 차가 다니지 않는 너른 마당이 있고, 집 안 창문마다 초록 나무들이 보이고, 영화에서 볼 법한 화목난로가 있다. 마당, 풍경 그리고 난로. 이 세 가지 때문에 사람들의 야유에도 나는 기어코 이곳으로 이사했다.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온전히 숲에 사는 장점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
이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트렌드 코리아 2021을 읽게 되었는데, 그 책에서 “레이어드 홈”이라는 개념을 보았다. “레이어드 홈”은 여러 벌의 옷을 겹쳐 입어 멋을 부리는 ‘레이어드 룩’ 패션처럼 집의 기능이 다층적으로 형성된다는 의미이다. 책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집과 동네’는 영향력이 커지는 트렌드였는데, 코로나로 전 국민이 오랜 시간 집에 머무르면서 집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이전엔 집이 그저 휴식의 기능만을 했다면, 이제는 각자의 취향이 드러나는 공간이 되었다. 단순히 지인의 집에 놀러 가는 것을 넘어 호스트의 취향이 궁금한 사람들이 타인의 집을 방문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오호라! 그럼 얼마든지 엄마의 일터이자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난 거실을 개방해서 수익화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집으로 오면서 상상해 본 것들을 현실화해 볼 수 있겠어!’
한참 기대에 부풀어 떠드는 나에게 친구가 조용히 URL 하나를 보냈다. 그걸 누르고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갑자기 어린 시절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이 떠올랐다. 엄마가 마른반찬 몇 가지와 김을 두고 나가면 혼자 밥을 먹기 싫었던 나는 마치 두 명이 같이 밥을 먹는 것처럼 연기하곤 했다.
“아줌마, 여기 김밥 3개만 주세요.”
“어머 손님, 어떤 재료를 넣어드릴까요?”
“깍두기랑 오징어젓, 계란이요.”
김에다 깍두기, 오징어젓, 계란을 넣고 돌돌 말아서 접시에 3개를 놓는다. 그럼 손님인 나는 그걸 맛있게 먹는다. 수년간 김밥을 팔던 꼬마는 스무 살 무렵 명동 거리에서 만난 충무김밥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이런 김밥을 진짜로 판단 말이야? 이거 내가 먼저 생각한 건데!!!!! (풉, 어쩌라고...?)
갑자기 왜 이런 뜬금없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냐면, 친구가 준 URL은 집주인의 취향을 타인과 함께 나누는 커뮤니티 서비스 “남의 집” 웹사이트 주소였기 때문이다.이런! 이걸 먼저 시작한 사람이 있다니!!!
“남의 집“은 2017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이다. 오픈을 하고 4년이 지난 뒤에야 내가 알았으니 그리 인기가 없었겠지 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꽤 많은 사람의 호응과 반응을 일으켰다.
‘그래, 꼭 선구자가 될 필요는 없어.’ 금세 꼬리를 내리고 무르익을 만큼 익은 이 프로젝트를 벤치마킹해 보기로 한다. 취향을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과 그곳을 찾는 이가 모두 존재한다면 엄마의 공간도 분명 시장 가능성이 있음이다. 정 안되면 내가 남의 집 프로젝트로 참여하면 될 일!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거실을 공유할 생각을 했을까? 이 프로젝트를 만든 김성용 대표는 아는 형과 함께 살던 연희동 셰어하우스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퇴직 이후를 고민하면서 자신이 가진 생산수단으로 제법 근사했던 “거실”을 착안했다. 처음 방문한 공간에서 낯선 이들과 어울리는 여행의 경험을 일상 속 가정집에서 나누기 위해 집으로 떠나는 여행을 만든다고 이 프로젝트를 명명했다. 처음엔 그저 자신의 주장이었는데 어느새 게스트들도 여행처럼 그 프로젝트를 즐기고 있었다.
남의 집 프로젝트의 호스트들을 살펴보면 서촌, 제주 등의 지역을 특화하거나 그림, 비건 디저트, 리폼. 와인, 달고나 만들기 등 뭘 이런 걸 다, 싶은 소소한취향까지 다양하게 공유하고 있다.물론 처음 취지와는 다르게 집을 오픈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작은 공방이나 카페, 작업실 등을 오픈하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집으로 외부인을 들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남의 집 프로젝트로 자영업자들이 돌파구를 찾은 걸 수도 있다.
어쨌든 남의 “집” 프로젝트의 색깔을 조금 잃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잠정적 경쟁업체라서 단점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이 대표는 남의 집 프로젝트를 “여행”이라고 했지만, 나의 콘셉트는 “연대”다. 엄마 사람의 연대. 주부의 일터인 거실을 오픈하고, 재주 많은 엄마의 재능을 나누는 공간. 청을 만들 수도 있고, 뜨개질을 할 수도 있고, 삶에서 체득한 것들을 배우고 나누는 공간. 노 키즈존 따위 없이 아이를 데리고 자유롭게 방문 가능한 안전한 곳. 지역마다 그런 엄마의 거실이 열리면 크게 비싸지 않은 금액으로 서로의 취미를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남의 집 프로젝트를 여러 각도로 뜯어보면서 이 생각이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미 시도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