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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작가 Oct 04. 2021

저의 취향은 '책'입니다.

거실 책방을 만들고 싶어요.

취미도 특기도 빈칸으로 내버려 둔 채 잘하는 것을 찾으려고 애쓰던 시절, 내 삶의 성적표는 낙오에 가까웠다. 공무원 시험에 낙방했고, 대기업 입사에 실패했고, 계약직을 전전하다가 간신히 정규직 직원이 되었다. 일은 그저 할 만했지, 보람이나 즐거움 따위는 없었다. 사람들에게 휩쓸리면 휩쓸리는 대로 휘청거리면서 출, 퇴근길을 오고 갔다. 아이를 갖고 회사의 권유로 퇴사를 하던 날, 홀가분하게 뒤돌아 나왔다. 그 시간에 대한 미련은 단 한 톨도 남지 않았다.


좀 더 열심히 살아볼걸. 한 번쯤은 힘에 부치는 도전 같은 걸 해볼걸. 그게 아니면 권고사직에 대한 항의라도 해볼걸. 그런 후회를 한 건 아이를 낳고 난 이후였다. 다시 사회에 발붙이기는 힘들 거라는 것을 온전히 피부로 느끼던 날, 나는 띵띵 불은 젖가슴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놀고먹는 여자가 된 것 같은 열등감, 직업이 없다는 결핍, 이 두 개의 밑바닥 감정은 시시때때로 내 이마에 붙은 낙오자 딱지를 확인시켰다. 그래서 더욱더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썼다. 매일같이 ‘육아서’를 읽다가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방통대 유아교육과까지 입학하게 되었다. “엄마”라는 역할만이라도 전문가처럼 해보겠다는 비장함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셋째가 태어났다. 몸이 하나, 팔이 두 개인 엄마가 아무리 기를 써도 완벽할 수 없는 상황이 시시때때로 생겼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전문적으로 육아를 공부하고 애써도 정답이 될 수 없구나. 움켜쥔 손의 힘을 풀어야만 이 상황을 유연하게 헤쳐나갈 수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때부터였다. 아이들로부터 한 걸음 떨어지기. 오롯이 아이만 바라보던 시선을 억지로 돌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으려고 애쓴 건.





성장 앨범 만들 듯 아이 사진을 가득 채웠던 SNS에서 나의 이야기를 적기 시작한 건 그즈음부터였다. 육아를 잘하기 위해 했던 내 선택에 대해 기록했고, 조금씩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가는 행위를 기록했고, 그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했다. 글을 쓰고 내 삶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안에 가득했던 결핍들이 조금씩 채워졌다. 열심히 애쓴 내 삶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 스스로 이마에 붙인 낙오자 딱지를 떼어냈다. 나는 낙오자가 아니라 내가 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위해 잠시 걸음을 멈췄을 뿐이라고, 그러니 기회는 다시 온다고, 조급해하지 말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후회 없이 사랑하며 살자고. 나 자신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우연히 그것은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단 한 번도 책을 쓰겠다는 생각도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여자의 홈런이었다.     


아이를 잘 키우려고 읽었고, 나를 잘 키우려고 썼다. 그렇게 시작한 읽고 쓰는 행위는 내 편협한 사고를 깨고, 시야를 확장하고, 좀 더 나은 내가 되도록 독려했다.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함께 책을 읽는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들을 받으며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용기를 내기도 했다. 책을 쓰게 된 것도 그들과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모든 삶의 변화는 책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책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어느새 나는 ‘책’에 진심인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취미이자 특기의 빈칸을 채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숨 쉬듯 읽고 쓰고 싶은 사람. 그게 나다. 나의 취향은 “책”이고 책으로 변화된 삶을 기록하는 “글”이다. 나는 엄청난 필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대단한 작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걸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즐거워서,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이 행위가 기뻐서 지속할 뿐이다. 그렇기에 엄마의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떠올렸을 때, 작가로서 글 쓰는 삶이 아닌 사람들과 책을 나누는 <거실 책방>을 떠올린 것이다.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고, 그것이 글이 되는 순간을,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 읽고 쓰는 행위의 유용함을 내 삶의 공간에서 충분히 나누고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 스스로 ‘낙오자’ 딱지를 붙이고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이 좀 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는 바람. 단지 “노동력”과 “경제력”이 우리의 가치를 훼손한다면 스스로 돌파구를 만들어 보자는 거창한 의미. 그런 마음들이 나를 조금씩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단지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일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거실에서 책방을 연 사람들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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