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가 되면 항상 하는 일이 있다. '올해는 어떻게 살았어, 내년에는 어떻게 살 거야? 아직 꺼내지 못한 너의 욕망은 뭐가 있어?' 그런 것들을 자문자답하는 시간이다. 한 해를 돌아보고 한 해를 살아갈 마음을 준비하는 일, 구체적으로 꿈을 그려보는 일이다.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원치 않는 것이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김수영 작가의 <마음 스파>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녀는 왜 나만 이렇게 힘든지, 세상은 왜 이토록 불공평한지 한탄하다가 꿈 목록을 쓰기 시작했고, 그 후로는 그 꿈들을 이룰 기회들만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자신이 바라보는 것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졌다고 했다.
에너지의 방향이 중요하다.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그것과 관련 없는 것에 마음을 쏟지 않는다. 아니 쏟을 여력이 없다. 그것이 열정이고, 몰입의 힘이다. 구체적으로 꿈을 그리고, 말하고, 기회를 찾아 움직이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말도 별로 없고 친구도 많지 않았던 시절 학교가 끝나면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대부분 창가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공상에 빠졌다. "종일 방구석에 뭐 하는 거야!"라고 소리치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멍 때리는 것이 취미이자 낙이던 시절. 현실에선 절대 불가능할 거라고 여기는 일들이 상상 속에선 전부 가능했다. 혹여 잠자리에서 그런 꿈이라도 꾸면 깨고 싶지 않아서 몇 번을 뒤척이며 안 일어났던 적도 있었다. 조금 커서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 그마저도 관뒀지만.
그때에도 나는 늘 원하는 것이 있었다. 종일 그 생각에 푹 빠져 살았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시절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했을까? 몽상 혹은 공상.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하게 그렸기 때문일까.
결혼한 이후에도 그랬다. 출산 직후 신생아를 키우는 일은 한없이 나의 시간을 축냈다. 시도 때도 없이 "앵~"하고 깨는 아기 때문에 하릴없이 옆을 지키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아이가 단 몇 분이라도 더 잠들어있기 바라는 마음으로 숨죽이고 누워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누군가에게 저당 잡혀있는 시간, 그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꿈꾸는 일이었다.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에서 긴치마를 펄럭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라든가, 아이와 남편과 자유로이 여행을 다니는 그런 상상. 그때의 나도 여전히 무엇도 이루지 못했을까.
어린 나와 결혼한 후의 내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 삶에 '주도성'이 생긴 거다. 무기력하게 공상만 하던 힘없는 아이는 결혼과 함께 독립된 한 인간이 되었다. 그저 막연한 언젠가를 꿈꾸기보다 오늘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물어보고, 찾아보고, 눈으로 보며 상상과 현실의 괴리를 따져보았다. 현실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생각에만 남겨둔다면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공상에 사로잡힌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다. 아니면 말고, 라는 단서를 달고 언제든 빠져나갈 구멍 하나를 만들어 놓는 것은 에너지를 분산시킨다. 단지 순간순간의 상상이 아닌 적고, 말하고, 그리는 모든 행위가 그 꿈에 집중하게 한다.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원치 않는 것을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효과이다.
행동하면 꿈은 꿈으로만 남지 않고 어떤 모습으로든 현실이 된다. 나는 그런 일들을 믿는다. 무엇이든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은 생각만 하는 사람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핑계 대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도전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열매를 가질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작든 크든 원하는 것을 매해 조금씩 이뤄가며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내가 원하는 삶에 조금씩 가까워지다 보면 언젠가는 존재만으로 꽃들에게 희망이 되는 나비처럼 살게 될 거라고. 그날을 꿈꾸며 오늘도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