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썬셋, 중년의 썬라이즈
갖고 싶은 능력에 끌려가거나...
빌려다 놓은 능력에 쫓기거나...
경험은 수동적인 행위일지 모른다. 선택의 발걸음을 뗀 것은 능동이지만 이미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들에 '한 번쯤 끼어든 것'은 아닐까. 그러고보면, 감당할 수 없는 경험이란 없다.
알지 못했던 것을 배우고자 했고, 접하기 어려웠던 것을 꼭 해보리라는 생각은 나의 청춘을 지배하였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거나 뛰어넘어서, 감정을 입힌 목소리를 냈던 그때에 나의 일부를 인정받고 싶었던지, 때로는 남자아이와 중년여성으로 뭉툭했던 호기심의 날을 세웠던 날들이었다.
호기로운 마음은 내가 깨어있는 시간을 질서있게 갈라냈고, 부분의 시간들은 나를 몰입시켰다.
몰입은 자꾸만 나를 작디작게 쪼갰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을 정도로.
감정선을 살린 연기에 대한 인위적인 노력들은 ‘나’라는 주체의 에너지를 몇 배씩 깎아댔다. 갖고 싶은 능력에 끌려가거나 빌려다 놓은 능력에 쫓기는 심정을 갖게끔 했다.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본능,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존재라는 것만으로 '나를 위한 자리'로의 툭툭 끼어들었다는 표현은 여기서 나오게 되었다.
'쫓기거나 끌려가고 있다'라는 것을 느낀다는 자체는 욕심에 차 있거나 영혼이 없을 때를 떠올리면 된다.
타인과 대화를 할 때 먼저 말하고 싶고, 더 많은 의견을 피력하고 싶은 것은 욕심일 수 있다.
‘완벽한 발언’을 하리라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함을 머리로만 알고 있었다.
상대가 아이가 되었든 성인이 되었든, 한 사람이든 백 사람이든... 무대 위에서 하는 아무 말 독백은 ‘허세로 부풀다 터지는’ 떠오르는 풍선 다발에 지나지 않는다.
지나고 보니, 수업을 잘해야겠다는 욕망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많은 것을 알려주려는 1인극에 불과했다. 기대에 찬 학생들을 졸지에 얼굴 없는 관객으로 만들었고, 눈치를 못 챙긴 나를 자책하며 불완전한 마침표를 찍은 적도 있었다.
딱 원하는 만큼 필요에 의한 적극적인 지지를 하려면 중심을 잘 잡아야겠다는 삶의 가치를 깨달은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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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이라는 건 혼자서는 잡기 어려울지 모른다. 제자리의 나는 이미 존재하는 평면에 놓인 한 점일테니 말이다.
2024년, 언제인가 밀도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즐거운 일에 집중할 때, 시간의 밀도가 커지는 걸 보면 찍은 점점이 물리적 중심을 이루어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풋 중년이 된 이제는 점들의 조화가 '쓸모 있는 실체'라는 것을 느낀다.
감각으로 다가가 몸으로 흡수한 경험들이 나의 전체에 기여하는 정신의 중심이 되어갔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의 마지막 편인 ‘감당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다’에서 채글한 문장이 있다.
'모든 것은 그대의 의견에 불과하며, 현재의 순간이 그대가 갖고 있는 전부라는 것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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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경험을 중심으로 한 조화로움의 표상이다.
청춘에 몰랐던... 나를 끌어당기는 경험을 발견할 안목을 이제 갖추었을까? 시간은 지금의 내가 밟고 있는 경험을 덮기 위해, 새로운 경험을 몰고 온다.
경험을 중심으로 조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싶다. 현재를 경험의 축으로 글을 써나가고 싶다.
[빛작 연재]
화 5:00a.m. [청춘의 썬셋, 중년의 썬라이즈]
수 5:00a.m. [새벽독서로 마음 챙기기]
토 5:00a.m. [청춘의 썬셋, 중년의 썬라이즈]
일 5:00a.m. [과학은 호두망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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