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썬셋, 중년의 썬라이즈
반하고 사랑하고 글로 남기는 일
짧은 글로 마음을 움직이는 일
어느 봄날, 마음속에 그려진 골목길이 있다. 즐거움이 멈춰도 좋을 그곳. 여의도 한 빌딩 앞의 공기와 온도는 잊을 수가 없다. 눈길은 마음의 길을 따르고 있었다. '반하는'순간의 피사체는 다름 아닌 하늘이다.
길 위에서 몸을 받치던 두 손은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구름을 보며 아이의 태명을 불렀고, 하늘이 예뻐서 중얼거리며 걸었다.
'엄마 산책하고 있어. 저 예쁜 구름 좀 봐. 우리 아가 기분은 어떠니?'
구름을 좋아하는 나의 입가로 미소가 모여들고, 자꾸만 마음이 출렁거렸다. 찰나의 경험은 소리로 바뀌는 기회가 되었다.
일을 쉬면서부터, 아침마다 91.9 라디오를 들었다. '하늘'이라는 주제로 사연을 보내라고 했다. 디제이는 가수 김정민 씨였다.
'하늘 하면 뭐가 떠오르니?'
마음에게 물으니 걸음걸이가 투박했던 그때를 손꼽았다. 라디오를 사랑하는 나는 사연을 보냈다. 짧은 글로도 마음이 움직였던지, 그 만의 감성을 건드리는 소재였던지... 사연은 소개되었다.
'아기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참 행복할 것 같아요, 예쁜 태교 하세요'
프로가 끝나갈 무렵... 나의 휴대폰 번호 네 자리가 불리었고, 화장품 세트를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같은 해 가을. 체리북이라는 책 만들기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다. 알고 지내던 방송작가가 '콘티'를 짜는 것보다 재미있을 거라고 같이 해보자고 했다. 어떤 방식인가 하면 매일 한 편씩 백일을 채우면 책을 무료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방송작가에겐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한 번도 글을 써보지 않아 막연했지만 고민을 멈추고 다짐을 했다. 다행인 건 학생이 그림일기를 쓰듯, 글자 수와 여백이 정해져 있었다.
콘셉트를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지 않았고, 나의 연애사나 결혼스토리가 아니어도 좋았다. 결혼 1주년, 부모님의 사랑이 북받쳐있던 차에 당신들의 연애사, 당신들의 결혼생활을 쓰기 시작했다.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의 탄생을 고대하며 말이다.
까무잡잡한 이마에 땀이 맺힌 채 테니스를 치던 아빠의 모습에 반했단다. 그 시절의 신부치고 키가 커서 맨발로 신부 입장했다는 우리 엄마. 모유가 부족해서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유만 사 왔다는 아빠, 아빠의 발령지가 너무 깡촌이라 냇가에서 기저귀를 빨아야 했다는 이야기,
아이 셋을 연년생으로 키워냈던 갖가지 에피소드로 페이지를 금세 채워갈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수백 번을 들었던 네버엔딩 스토리는 백일을 너끈히 채웠다. 마침내 책은 완성되었다.
엄마의 생신 선물로 직접 쓴 책을 드렸다. 우리는 기억나는 순간들에 함께 웃고 또 울었다. 기록이 왜곡되지 않았지만 설명이 필요한 시점도 있었다. 엄마는 삶의 일부를 내레이션 하듯 들려주었고, 모녀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한참 후에 나의 결혼스토리를 적고 싶어 찾았을 때에는 홈페이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늘에 반하여 영감을 얻고, 엄마가 아빠에게 반하여 영감을 얻은 것은 지난 일이다. 그런 과거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소재가 되는 것이 신기하다. 라디오 사연과 러브스토리의 기억이 복원되니, 보석이 되었다. 서랍에 들어있던 시간의 증거들이 책이 되다니.
반하고 사랑하며 글로 남기는 일은 느낌의 가짓수를 늘려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뜨겁게 흐르던 사랑은 곧 식기 마련이고 식은 그대로의 모양으로 굳어 단단함의 속성을 띤다.
이제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주고 싶은 글을 적고 싶다. 유한한 시간 동안 무한대로 반하고 사랑하고, 한없이 큰 영감을 선물하고 싶다.
[빛작 연재]
화 5:00a.m. [청춘의 썬셋, 중년의 썬라이즈]
수 5:00a.m. [새벽독서로 마음 챙기기]
토 5:00a.m. [청춘의 썬셋, 중년의 썬라이즈]
일 5:00a.m. [과학은 호두망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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