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나는 몰입을 좋아한다. 눈과 손끝이 만나는 점에서 도파민이 나오는 것 같다. 자신의 생각을 적는 가족캠프에서도 '쉼과 몰입'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다.
몰입은 누구에게 얻어올 수 없다. 외부에서 잠시 얻는다 해도 지속성은 자신이 키워야 한다.
몰입이라는 물고기는 당장에 누가 잡아줄 수 있지만 나름의 잡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 가족이 각자의 물고기를 잡는 일은 보드게임이었다.
이사 후, 책꽂이를 정리하다 두 아이가 더 이상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 '인생게임'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긴 여정 속의 두 갈래 길을 선택하는 방식의 그림판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 주사위 두 개를 던져, 대학 생활과 직장 중에서 하나를 고르며 게임이 시작된다. 현실처럼 월급을 받거나 학비를 내야 한다. 칸칸이 학위와 직업에 맞게 세금을 내거나 환급받는 부분도 있다. 또 소송, 차용, 투자라는 생활경제를 알아야 하는 것도 있다.
아이들은 돈의 역할을 배우고, 어른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 겪어보지 못한 일을 해볼 수 있다. 부모와 포개져있던 아이의 생각이 따로 떼지는 기회였다.
풀빌라에 살고 싶다든지, 결혼은 몇 살 때 할 건지, 유학 가서 어떤 공부를 하겠다든지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초등학생 아이들의 아무 말 대잔치 같았지만 살짝 열린 속마음을 보는 것이 흥미진진했다.
꿈은 미래의 씨앗이 된다고 믿었다. 시간을 성큼 건너 상상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무척 진지해져 갔다. 미안하게도 아이들의 픽션은 우리 부부의 논픽션과 버무려졌다. 아파트를 열 개를 산다고? 아이를 열명을 낳는다고? 이룰 수 없거나 틀린 것처럼 우리는 가르치려 했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꼭 짚어가며 알려주고 있었다. 내가 나를 돌아보는 기회를 얻었다. 왜 엄마들의 걱정과 잔소리를 아이들이 흘려듣는지 알 것 같다. 나 같아도 고개를 절래 흔들 것 같다.
게임마저도 간섭을 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아이는 현실과 게임을 분명히 구분하면서 즐기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희망을 건져 올리는 순간이었다.
게임 분위기에 빠져든 우리 부부는 적어도 지금까지와는 반대의 선택을 했다. 가지 않은 길이 궁금해 그동안의 경험을 진화시켜 보기도 했다.
게임판에 압축된 인생사의 긴박감은 주사위 두 개로 판가름 났다. 게임 특성상 취업, 결혼, 출산축하금도 받을 수 있다. 반면에 교통 속도위반 범칙금도 있고 집과 차를 팔고 사는 우리의 다반사가 들어 있다. 때마다 순간은 몰입과 무방비의 연속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은퇴라는 칸에 머물렀을 땐 각자의 앞에 정리된 색색의 지폐를 살폈다. 게임이 끝날 때가 되어, 노란색 100만 원, 하늘색 50만 원, 흰색 5만 원이 얼마나 모였는지 세보았다.
은퇴 칸에 다다르면 몇 가지 지시에 따라야 하는데, 모든 빚을 이자와 함께 은행에 갚아야 하는 게 일 순위다. 직업카드와 월급 인상 카드도 처분하고 집을 카드에 적힌 대로 팔아야 한다. 자녀 수대로 한 명당 10만 원을 은행에서 은퇴 선물로 주기도 한다.
삶에 몰입과 무방비가 파동 치듯, 던져진 주사위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꿈 때문에 무심했던 길을 만날 때가 있다. 작은 게임판을 통해 몰입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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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인생 게임의 한 칸이다. 아이들에게 물고기를 잡아다 주는 어른이었나 아니면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었나.
하루의 게임을 끝내며, 이제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가야 한다.
[빛작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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