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연은 큰 아이가 아홉 살 때부터였다. 아파트와 학원이 밀집해 있고, 성당과 학교가 공통분모였다. 우린 서로의 세례명을 불렀고, 점점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꽃집 언니 요세피나는 심미적인 노력을 좋아했다. 속눈썹 펌, 보톡스 그리고 물광 주사를 맞으며 시시 때대로 모습을 달리했다. 꽃을 손질하고 가꾸듯 자신을 아끼니, 언제나 시들지 않는 여자였다.
꾸미기를 좋아하고 필자와 같은 직장을 다녔던 그녀는 메르치다. 유행에 빠르고 옷을 잘 입는다. 파란색 바지, 은색 운동화가 잘 어울린다. 그녀는 상대를 치켜세우기 잘하는 어른스러움을 가졌다.
딸은 발레를 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신념을 가진 '시옷'맘은 요세피나와 메르치와 필자의 자녀들을 모아 농구팀을 꾸렸다.
농구시합에 나가기로 결정된 후, 아버지들은 공동 코치가 되어주었다. 아이들과 주말마다 4쿼터 게임의 의지를 불태웠다. 우리의 공통 관심사는 남편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저녁식사와 수다를 위해 한 시간을 걸은 적 있었다. 03시, 새벽길에 눈을 맞으며 팔짱을 끼고 걷던 대로변 길은 지금도 여전한지 궁금해진다.
한 달 후에 이사를 간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 날이었다. 필자 옆에 앉은 요세피나는 약간의 싸함을 감지한 후, 대화에 분무기를 뿌렸다. 모두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시들어버릴 우리들의 꽃잎 같은 손을 잡아주었다.
멋진 제안과 함께.
바로 ‘여행계’였다.
훗날, 아이가 크면 넷이서 여행을 가자는 계획은 이사 후에 급물살을 탔다. 요세피나의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메르치는 한 달 살기 명소인 '제주'를 수다의 도마 위에 올렸다. 해물라면을 꼭 먹어야 한다는 '시옷'맘은 칼 같은 한마디와 '남편은 아이를 절대로 굶기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날렸다. 여행의 방점은 '인생 사진'이었고 '주부 독립'의 정신은 출발의 기동력이 되었다. '간다면 간다'! 정말 확고했다.
각자 렌터카와 숙소를 예약했고, 맛집 리스트를 채팅방에 올렸다. 오직 자신만 신경 쓰고, 차려진 식사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은 주부들을 설레게 했다. 금요일 밤이 되었다.
'3박은 잡아야 하는 거 아니냐, 하루지만 가정을 떠나 즐기고 오라'는 남편의 빈말은 공항까지 픽업해 주는 미더움을 낳았다.
오후 10시,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둘씩 팔짱을 끼고 숙소 방향으로 걸었다. 맏언니 요세피나는 앞장서서,
‘차는 언니가 책임지고 운전할게!’라며, 밤길을 달렸다.
허기였을까 호기였을까. 11시가 다 되어, 불 켜진 밀면 집에 쑤욱 들어갔다. 육수 국물은 엠티 느낌마저 들게 했다. 음식 맛보다는 가족과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이 훈훈함을 더해갔다. 맥주와 과자 몇 봉지를 사들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마당이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네 사람은 두 개의 킹사이즈 침대 위에 무언의 짝꿍 표시로 휴대전화를 올려두었다. 스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학부모의 가면인 화장을 벗고 ‘맨 얼굴의 동침’이 있기까지 분위기가 익어 갔다. 이야기의 중심은 엄마와 아내가 아니었다. 명소 위주로 코스를 짰던 가족여행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자모들과의 1박을 주제로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같은 목적을 품은 줄 알았는데, 짐꾸러미를 통해 들통이 나버렸다. 숙소 주인이 내려준 커피로 식사를 마친 후 각자의 짐을 풀기 시작했다 무방비 상태인 나의 캐리어가 초라해 보인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옷으로 싸여 있는 메이크업 풀 세트와 지름이 20센티쯤 돼 보이는 거울을 꺼낸 요세피나는 얼굴의 각도를 요리조리 바꾸고 있었다. 메르치의 가방에서는 디자인과 길이가 다른 치마만 세 개, 옷의 콘셉트에 맞출 신발과 가방들이 쏟아져 나왔다. 필자에게는 환상적인 여행 가방이었다.
어느새, 요세피나는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옷을 입었다. 숙소 밖은 예뻤다. '시옷'맘의 미션이 시작되었다. 인생 샷은 뭐니 뭐니 해도 점프 샷이라 했다. 삼각대 없이 세 명씩 높이 뛰어올랐다. 웃을 힘이 없을 때까지 웃으며 우린 더 높이 뛰었다. 찍을수록 모두 귀여워져 갔다.
다음 코스는 지드래곤 카페가 있는 애월읍이었다. 풍경을 즐기라며 요세피나는 차를 서행했고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자, 메르치는 차 안에서 바빠졌다. 배낭 안에서 꺼낸 하얀색 캉캉 롱치마가 바지보다 잘 어울릴 테니, 내게 빌려주겠다고 했다.
후사경으로 힐끔 쳐다보는 요세피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바람막이를 입은 '시옷'맘은 립밤을 고쳐 발랐다. 강풍이 부는 대로 신발을 갈아 신는 바람에 차는 아무 곳에 세워졌다. 바닷바람에 머릿결과 캉캉 치맛자락은 바닷물처럼 물결쳤다.
기온을 무시한 '멋 부리기'로 같은 위치에서만 몇 장의 사진을 찍었는지 모른다. 너무 추웠다. 바로 차에 올라타 해물라면 집으로 향했다. 좁은 차 안보다는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해물라면 가게 앞이 좋았다. 해물의 향은 상가들 틈으로 오밀조밀 채워져 갔다.
손님이 라면집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간이 테이블들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네 여자는 붉은 대게 살이 담가진 국물과 면을 들이켰다. 주부들의 로망인 ‘해방의 맛’이었다.
오솔길을 걷다 한적한 곳에서 사진 촬영이 이어졌다. 통유리 창으로 바다를 볼 수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선글라스를 바꿔 끼고 한 방향을 주시하고 있는 여인들의 마음은 푸르디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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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는 채팅방이 조용했다. 통장에 차곡차곡 여행비가 쌓여가고 있다. 소박하디 소박한 여행이 다시 기다려진다. 모두 스탠바이 중.
[빛작 연재]
화 5:00a.m. [청춘의 썬셋, 중년의 썬라이즈]
수 5:00a.m. [새벽독서로 마음 챙기기]
목 5:00a.m. [엄마가 쓰는 유리병 편지]
금 5:00a.m. [엄마가 쓰는 유리병 편지]
토 5:00a.m. [청춘의 썬셋, 중년의 썬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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