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아무것도 헛되이 낭비되지 않은 셈인가?
따로따로 살펴보면, 내 지적인 방황과 빗겨 나 샛길들은 저마다 영글지 못하고 무질서한 이성이 남겨놓은 산물로서, 낭비된 시간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다 함께 연결 지어 보면, 낭비된 시간들이란 샛길을 거쳐야만 울퉁불퉁한 땅을 지나 전진이 가능하다는 현실을 잘 알게 되었고, 샛길들이 모두 이어져야 곧고 어림없는 직선을 이룬다는 사실도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완전히 매혹되었다가 환멸을 느끼게 된 다음 저버린 위대한 사상들에 대한 나의 불성실함은 본질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형성했다. (행운이 아니라 운명이랄까, 뭐라고 이름 지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행운은 시각(視角)과 자비를 지닌 듯싶었으며,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이제 와서야 나는 그것이 나를 어디로 안내했으며 내가 무엇을 하길 기대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미래의 외침을 듣고, 외침의 원하는 바가 무엇이며, 왜 그것이 부르고, 우리들을 어디로 부르는지 파악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기를 기대했다.
온통 기쁨으로 부글거리며 피가 내 머리로 끓어올랐다. 펜을 들어 나는 원고지의 꼭대기에다 내가 시작하려는 최후의 결정적인 작품의 주제를 써넣었다.
영혼의 자서전, 카잔차키스
내가 시작하려는 시간_ 빛작
작은 못이 그려진 동화책을 펼쳤는데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글이 번식하는 연못에 비치는
정신은 하늘이고 생각은 구름이었다
모습 그대로의 어떤 필살기는
단단하고 우아한 뿔이 되었는데
작가 생태계 속 한 개체로
살아가는 생존 전략이 되었다
작가의 마음으로 사슴에 이입되어
각자의 가지뿔로 은신하다가
오래오래 남는 한 영역이 되어
꿈이 두 다리로 나를 버텨내고 있다
한 마리 사슴이 되어 번식하는 동안
은유, 직관, 논리, 통찰은 저마다의 힘이 되고
작가 존재 그 자체를 말해주지만
자기 안에서 달려드는 사자가 될 때가 있다
하나의 하나에 의한 믿음만으로
네 다리로 내달리던 힘은 약점이 되어
나무 곁에 뿔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고
무기가 되려는 글 연못에 함몰되고는 했다
엉덩이로 쓰든 발로 뛰며 써내든
뿔은 뽐내지 않아야 글로써 살고
꿈으로 내달리는 다리는 헛되지 않겠다
존재하는 글은 낙각*을 견디고 새롭게 태어나겠다
본 브런치북 '빛나는 문장들'은 인문학 서에서 발췌한 글귀와 저의 짧은 글을 담고 있습니다.
글벗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낙각 : 겨울 내내 자란 사슴의 뿔이 봄에 떨어져 새 뿔을 준비하는 시기
* 영혼의 자서전, 카잔차키스, 열린 책들, 2019
#카잔차키스 #인문학 #원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