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만 해도 좋은, 행궁동
날씨 좋은 주말, 어딜 갈까 생각하면 가장 먼저 행궁동을 떠올린다. 서울 북쪽 끝에서 시작한 나의 타향살이는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고 그때마다 새로이 마음 둘 곳을 찾아 걸었다. 어느 가을 우연히 가게 된 행궁동의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뒤로 종종 따뜻하게 걷고 싶은 날이면 행궁동으로 간다.
행궁동엔 골목길이 있다. 조금만 고개를 들어도 두 눈 가득 하늘이 들어오는 골목길이 있다. 아주 어린 시절, 아파트가 아닌 골목길이 있던 동네에 살았던 기억이 나의 유년 시절 추억을 풍성하게 해 주었다. 작고 넓은 앞마당, 화단 옆 돌계단, 집집마다 다른 색의 대문 그리고 초인종, 붉은 벽돌 기둥, 공터의 모래밭. 사소하고 작은 것도 아이들에겐 놀이터가 된다. 그 기억들로 골목길을 걷는 것만으로 매일 지나다녀도 항상 색다른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미지를 탐험하는 기분이 든다.
행궁동 골목길을 탐험하고 조금 큰길로 나오면 수원 화성으로 이어지는 천변을 따라 걸을 수도 있다. 수원천 양 옆으로는 시장이 있다. 지동시장, 영동시장. 말만 재래시장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이 활발하게 오고 가고 물건을 사고팔고 있다. 시장에서 찬거리를 사는 것은 나에게도 어색한 일지만, 걷다가 출출하면 꽈배기, 닭강정 등 군것질도 할 수 있다. 영동 시장 2층엔 청년몰도 생겨서 한 끼를 제대로 먹고 다시 걷기에도 좋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회사가 강남 테헤란로에 있었다. 출퇴근길 붐비는 것에 기력이 다할 것을 예감한 나는 학교 근처에서 회사 근처로 방도 옮겼다. 고개를 높게 쳐들어도 고층빌딩 사이로 하늘이 조각조각 보였다. 하늘을 볼 생각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주변에 선릉공원 마저 없었더라면 물기 한 점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늘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바쁜 사람들 사이를 통과하는 일이었다. 무엇 때문에 저리 바쁘고 빨리 지나가는 것일까? 점심시간 커피를 마시며 바라본 사람들의 속도에, 나도 모르게 그들이 사무실로 돌아가 할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무엇하나 내 손에 잡히지 않는 중요하지만 가늠할 수 없는 일들이었고, 그 생각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그때는 단순히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맞지만, 많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바쁨의 열기가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시장의 붐빔에서는 오히려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역시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골목길, 시장, 무엇보다 성벽과 집, 가게가 어우러져 있는 곳. 언젠가 그곳으로 방을 옮겨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