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조르주 쇠라, 1884년경
예전에 외국인들이 우리의 ‘휴일’ 관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뭘? 이라고 되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예를 들어서 주말에 놀러 간다는 계획이 세워지면 외국인은 토요일에 가서 일요일 저녁 늦게 돌아오는 full two days의 계획을 세우는 반면, 한국인은 토요일에 가서 (월요일 출근을 걱정하며) 일요일 오전에 돌아오거나 늦어도 저녁 먹기 전에는 come back 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 같다는 감상이었다.
흠, 듣고 보니 그랬다. 왜냐. 일단 길이 막히는 것이 무지하게 싫고(이럴 경우 일요일 오전 귀경) 그래도 놀러 온 기분을 내며 점심은 먹고 오후에 돌아오는(그래야 조금이라도 쉬지)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주말여행을 가도 일요일 저녁을 먹고 출발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기분을 한껏 낸다며 점심 먹고 차 마시고 출발한 적은 있지만.
그러면서 외국인들이 그랬다는 거다. 왜 일요일에 월요일 걱정을 하느냐. 놀러 왔으면 노는 거에 집중해야지. 월요일 회사에 가서 피곤할 것을 걱정하면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휴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라마다 각각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요. 물론 노는 것에, 현재에 100% 집중하는 외국인의 방식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피곤에 '쩔어서' 시작하는 월요일은, 그렇지 않아도 싫은 월요일의 무게를 더 가중하여 '못 견디게 싫게' 만들기에 우리의 휴일 보내기 방식을 바꾸기도 역시 쉽지는 않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토요일’은 전국이 막힌다. 요 몇 주 주말에 지방 갈 일이 많았는데 토요일은 모두들 어딘가로 간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도로 사정이었다. 다들 나와 같은 목적은 아닐 테고 놀러 가는 사람, 일하러 가는 사람 등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새벽 6시도 되기 전부터 경부고속도로는 차량이 많다. 그 이후에는 더 많아진다니까 말 다했다.
올라오는 길 역시, 아니 더 막힌다. 내려가는 시간은 나름 분산이 많이 되지만 올라오는 길은 다들, 아니 많이들 ‘저녁’ 시간에 맞춰지기 때문이다. 왜? 오늘은 full로 놀고 내일 하루, 그러니까 일요일은 온전히 쉬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안쓰럽기도 하다. 얼마나 주중에 일에 시달렸으면 일주일의 그 하루를 ‘Get’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기를 쓰고 엑셀을 밟는가.
그래서일까? 일요일은 고속도로도, 도심도 토요일에 비해 헐렁하다. 토요일의 끔찍한 상습정체 구간도 ‘그 정도’로 심하지는 않다. 운전을 하다 보면 이런 우리의 팍팍한 현실에 짠한 마음이 눅진하게 차오른다.
외국인과 우리의 ‘휴일 정서’ 차이를 듣고 나서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봤을 때 나는 우리나라였다면 ‘그랑 자트 섬의 토요일 오후’로 요일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사람이 우굴거리는 요일은 현재 우리 실정에는 ‘토요일’이니까.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인상주의’를 배우면서 조르주 쇠라의 이 그림을 보게 되었다.
점묘법이라니, 엄청 신기해하면서 그의 그림을 봤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이렇게 점을 찍어서 그림을 완성시킬 생각을 했을까? 장난기인지 실험정신인지가 강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에 대해서 찾아보면서 역시 ‘과학자’로서의 성향이 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점묘법’ 같은 시도를 할 리 없다. 질서와 원칙을 중시했을 것 같다. ‘정제된’ 것과 같은 그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술은 참 신기하다. 작가의 본성을 숨기려야 숨길 수 없다. 고스란히 작가의 개성이, 본성이 작품에 드러나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다.
그의 그림을 알고, 그리고 점묘법이라는 그의 스타일을 접하고 나서 항상 ‘비’가 내리면 나는 그를 떠올린다. 왜? 비가 오는 창을 통해서 보는 창밖의 풍경이 나에게 점묘법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조르주 쇠라의 눈을 통해서 풍경을 보는 것 같은 느낌. 비 오는 날 운전을 할 때에도 나는 그를 떠올린다.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보면서도, 그 맑게 갠 화창한 날의 햇빛 속에서도 ‘비’의 느낌을 떠올리는 것은 나의 이런 감상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랑 자트 섬은 파리 근교에 있는, 그래서 파리 시민들이 자주 찾던 휴식처였다고 한다.(우리나라로 치면 양평 같은 느낌일까?) ‘죽기 전에 봐야 할 명화 1001점’이라는 책에 따르면 하위 중산계층 사람들(역시 그 당시에도 돈이 들지 않는 이런 식의 여가를 즐긴 것은 ‘하위’라는 것이 그냥 마음에 걸린다……)이 금쪽같은 휴일을 즐기기 위해서 섬을 산책하고 일광욕을 하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때는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일까? 옷을 한껏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로 웃통을 시원하게 탈의한 건장한 남성도 보인다. 남자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지그시 강물을 응시한다. 경직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난주에 뭔가 언짢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지 넘겨짚어 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건 반장이 잘못하고 있는 거야. 내일은 가서 말을 해야지.’
우측의 남녀 커플. 여자의 치마를 보면서 항상 궁금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엉덩이 부분이 1+1일 수 있단 말인가. 너무 노골적인 것 아닌가? 하지만 책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음란함을 상징하는 애완용 원숭이로 인해 창녀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렇군요. 그녀로서는 이렇게 한껏 부푼 치마를 입을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곳곳에 뛰노는 강아지들을 보니 ‘목줄’이라는 것만 없지 13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휴일을 보내는 사람들의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주중에 사람들에게 한껏 시달리고 주말에는 어딘가 ‘자연’을 찾아서 떠난다. 자연에게 위로를 받는다. 자연이 주는 생명력과 싱그러움을 폐부 깊숙이 호흡하고 돌아온다.
“여보, 우리도 내일은 마리를 데리고 근처 그랑 자트 섬에라도 다녀와요.”
“어쩌지? 사장이 잔업을 하라고 해서 나 내일 회사에 가야 하는데.”
남편과의 대화에 한숨은 나왔지만 하얀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마리와 함께 온 부인은 그래도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수줍음이 많은 소녀는 풀꽃 다발을 만들고 있다. 그녀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속을 끓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숫기가 없어서 언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머니는 근처에 괜찮은 총각은 없을지 두리번거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 저 멀리에 카누를 타고 있는 건장한 청년들이 보이니 한 가닥 희망이라도?
이렇게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평화롭다. 한가롭다. 따뜻한 햇살 아래 빛나지 않는 것은 없다.
둥근 점묘법으로 표현되어 그것이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한없이 부드럽다.
강물에 띄운 카누와 돛단배들은 섬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뛰어노는 아이들과 강아지들,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어떤 약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강력한 힐링을 받고 있는 중이다.
잠시 속세의 신산한 고통을 옆으로 밀쳐두고 지금은 푸르름이 주는 눈부신 아름다움에 영혼을 담근 채, 그렇게 카르페디엠을 즐기는 행복감이 전해진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충실하게 휴일을 즐기고 있다는 대리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월요일’을 걱정하지 말자. 2일은, 5일에 비하면 너무 짧은 ‘한 순간’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