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가츠시카 호쿠사이, 19세기경
나는 굳이 고르라고 한다면 여행지로 자연보다는 문명이 있는 곳을 선호한다. 땅의 기운마저 유쾌했던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왜 로마 그리스 문명이 아니고 그리스 로마 문명인지를 깨닫게 해 준 고고한 원류의 나라 그리스도 엄청나게 사랑한다. 이들의 인근 국가로, 아니 고대에는 이들이 살았던 땅 터키도 그야말로 볼거리가 넘쳐나는 보물창고. 중국 역시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여러 국가의 흥망성쇠가 잦았던 만큼 (지인들이 초두부 냄새에 미간을 찌푸려도) 여행지로서 항상 핫플레이스로 순위에 올려놓고 있다. 아직 인도도 이집트도 남미도 가지 못했는데 코로나로 길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래도 좀만 더 참으면 3년 이내에는 정상화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여행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자연’이라는 자연인들이 존재한다. 내 주변에도 그렇다. 오히려 자연파가 은근히 많은 것이 현실이다. 전 세계의 국립공원을 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 인적이 없는 척박한 고원지대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자연의 품에 안겨야 비로소 여행을 온 실감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인간들에게 시달리고 염증을 느낄 즈음에는 자연을 보는 것에서 위로를 받는다. 단순히 집 근처 나무 한 그루, 그 신록의 싱그러움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상쾌해지니 여행지로서 자연 풍광이 좋은 곳을 높이 쳐주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항상 마음 한 구석에는 ‘역시 여행은 문명, 역사, 문화지.’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들락거리거나, 메가 시티의 한 복판 벤치에 앉아 수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은 그야말로 ‘순삭’이다.
그런 나에게도 자연의 ‘장엄함’에 대해서 느끼게 해 준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그랜드캐니언에 갔을 때였다. 라스베이거스에서 450km의 거리를 한낮의 뙤약볕을 받으며 인적 드문 도로를 운전해서 갔다. 서울-부산 거리보다 좀 더 긴 거리네. 여행 준비부터 몸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닌데 식은땀이 나는 느낌이었다. 9월이라고는 하지만 사막이 펼쳐진 불모의 땅은 기온이 40도를 웃돌았다. 에어컨을 켰어도 외부의 열기가 훅 끼쳐오는 느낌이었다. 차량의 통행이 많지 않고 단조로운 흐름은 졸음운전하기 딱 좋은 컨디션이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허벅지를 꼬집어 가면서 운전했다.
새벽에 출발했는데 그랜드캐니언 숙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가 다된 시간이었다. 운전대를 놓자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도 널브러져 자고 싶었으나 일행이 있어,,,,,,무사고 운전을 했다는 기쁨을 잠시 누리고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는 그랜드캐니언으로 들어갔다. 사실 미서부를 여행하면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이나 요세미티 등 가볼 국립공원은 천지 빽빽이다. 그래서 고민했는데 나의 선택은 그랜드캐니언이었다.
그리고 그랜드캐니언에 들어가서 지구의 속살을 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저 ‘장관’이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할 말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았다. 중국의 호도협이나 석림을 봤을 때에도 굉장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랜드캐니언의 ‘그랜드’한 광경을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세계 최고 규모의 협곡인 그랜드캐니언. 협곡 아래로는 언뜻언뜻 콜로라도 강이 보이기도 한다. 오랜 세월 퇴적, 융기, 침식 등 자연의 손길을 거치면서 이 대작은 탄생되었다. 붉은색부터 무채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의 그러데이션을 볼 수 있고 사람이라면 조각할 수 없었을 다양한 모양의 협곡이 끝도 한도 없이 펼쳐진다.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으로 그랜드캐니언이 이름을 따박따박 올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앞에 서면, 그야말로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점? 먼지? 와 같은 크기로 한없이 쪼그라든다. 위대한 자연 앞에서 나는, 한낱 인생사 아무것도 아니라는 호기로운 마음과 자연의 대범함을 나눠 받는다.
사실, 이 그림을 봤을 때에도 나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거대한 파도 아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저 파도에 몸을 맡기는 서퍼의 심정으로 파도를 타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닌가. 어 자세히 보니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에 배를 탄 사람들이 보인다. 파도와 같은 물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흘수선이 낮아 보이는 배에 그야말로 ‘납작’ 엎드려 있다. 마치 서퍼가 몸을 서핑보드에 댄 모습과 흡사하다.
“지금은 몸을 움직이면 안 돼. 일어나서도 안돼. 납작 엎드려!”
누군가가 긴급하게 외치지 않았을까. 성난 것 같은 파도의 흰 포말은 마치 악귀의 손처럼 날이 서 있는 것 같다. 그 손으로 뭔가를 낚아채려는 것처럼 화난 모양새다. 잡은 것은 놓치지 않겠다는 손아귀의 힘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역동성이 코발트 빛 바다의 색과 잘 어울린다. 아름다우면서도 두려움이 엄습하는 바다의 한 때, 찰나를 잘 포착했다. 저 멀리 하얀 눈을 이고 있는 후지산도 보이는군요. 후지산 역시 파도와 같은 양식으로 표현되어 조화롭다. 상단의 눈 부분은 하얀색, 산은 녹색이 아닌 파란색으로 표현하여 세련미를 뽐낸다.
그렇다. 나는 이 판화를 봤을 때 엄청나게 세련되었다고 느꼈다. 간결하면서도 힘차다. 군더더기가 없다. 색의 선택 또한 탁월하다. 전체를 지배하는 파란색의 청량감은 보고 있는 이의 기분을 고양시킨다. 나와 같은 느낌을 멀리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및 작곡가들도 강렬하게 받았나 보다. 그들은 그의 판화에 매료되어 영감을 받았다고 하니 가츠시카 호쿠사이는 서양 근대 예술사에 끼친 영향이 어마어마하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의 이 판화는 ‘후지산 36경’ 연작 중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 저 멀리 후지산이 보였던 거군요.) 이 연작 시리즈는 발표되자마자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었다고 하니 로컬과 글로벌을 동시에 만족시킨 명화라 할만하다. (말하자면 기생충 같은 거였나 봄) 일본 판화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의 청색 안료 프러시안 블루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런 실험정신이 이 판화의 호쾌함을 불러 넣은 것은 아닐까. 우끼요에 중에서 단연코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이었다.
높은 파도 아래 납작 엎드린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어서 빨리 이 파도가 무사히 지나가기를. 배가 뒤집히거나 누군가 휩쓸려 바다로 사라지는 일 없이 우리 모두 무사하게 귀환하기를 간절히 빌고 있지 않을까. 여기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파도를 거스를 수도 없다. 헤쳐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납작’ 몸을 낮추어 기다린다. 어서 이 높은 파도가 지나가기를. 아름다운 프러시안 블루 빛을 띤 파도가 우리를 헤칠 리 없다고 거듭 생각할 것이다. 우리에게 먹거리를 선사하는 고마운 바다가, 그 넉넉한 바다가 우리를 집어삼킬 리 없다고.
자연의 스케일은 크다. 감히 인간이 흉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 웅장함과 장엄함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스케일도 한 평,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호연지기를 기르고 싶다면 자연을 벗하는 것이 한 방법인 것 같다. 매일매일의 일상에 지쳐있다면 역시 일상에서 한 발 물러나, 인간사에서 한 발 떨어져 자연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방법이다. 크게 호흡하고 내뱉는다. 마음이 호흡 따라서 넓어지는 것을 상상한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기다린다. 내 마음이 자연의 스케일을 닮아 넓어지기를. 저기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납작 엎으려 기다리고 있는 뱃사람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