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의 계절

독서여가-정선, 18세기

by 루시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순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음료나 음식을 주문할 때. 원두를 선택하고 음료의 사이즈를 선택하고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할지 말지, 다른 바닐라샷은 필요 없을지, 라테를 즐기고 싶다면 우유 옵션을 뭘로 할지, 저지방인지 소화가잘되는우유인지 무지방인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두유나 오트와 같은 식물성 옵션으로 할 것인지?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아이스인지 뜨거운 것을 원하는지 등등. 이러한 것들을 결정하는 사이 나는 어떤 성향을 사람인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또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순간은 평가의 계절에도 찾아온다. 자영업자라면 세무신고의 달에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평가를 당하기 전에 항상 스스로 엄격한(?) 자기 평가의 순간을 거치게 된다. 속 편히 실적으로(물론 속이 쓰릴 수도 있겠으나) 평가를 받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상당히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과연 나는 1년을 어떻게 보낸 걸까. 백지만큼 하얀 머릿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의 업적을 생각해내며 잘했다고(자기 PR의 시대이므로) 평가를 하는 것으로 장식을 할 수도, 혹은 아주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최선은 다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개중에는 숫자로 심플하게 정리되는 성과도 있고 일부는 성향이나 자질에 대한 평가가 들어가기도 한다. 특히 다면평가라거나 리더십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는 숫자 외의 다른 것들에 대한 평가가 들어가므로 평가를 하는 본인도, 타인을 평가할 때에도 상당히 고민되는 지점이 발생되기도 한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해 안 되는’ 사람들은 일정 비율로 존재한다. 특히나 모든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는 파렴치한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희한하다. 본인이 잘못한 것도 어떻게 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귀책’으로 돌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왜곡’이 결국 조직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희한한 것은 그런 사람이 조직에서 인정을 받고 승승장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얘기를 나눠보면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도 조직은 무슨 논리로 그런 왜곡자를 승진으로 보상하는지는 미스터리다. (딱히 실적이 좋은 것도 아닌데 말이죠.)

다른 부문에 있는 친구에게 그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 도대체 그렇게 왜곡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고 울분을 토하다가 친구의 한마디에 입틀막을 하고 말았다.

“야, 우리 쪽에도 그런 사람 널렸어.”

아차차, 이런 실례를. 기가 죽은 나는 발길을 돌려 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 해를 돌아보니 나는 딱히 잘한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못한 일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한 해를 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네, 그래서 반성 많이 했습니다. 다음에는 기필코! 실적을 내리라고 다짐도 했고요.

지난 다면평가에서 나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것 역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어서 만지면 아프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번에는 과연 어떨까. 저번보다는 나은 평가를 받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솔직히 ‘평가받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이르게 된다. 이런 평가는 단순히 나 혼자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학창 시절의 학점 따기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이므로 더 한숨이 나온다. 끊임없이 평가를 받는다는 것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나씨나길이 잘 안된다. 그동안 소심해진 나 자신의 탓도 있겠으나 여하튼 점점 더 ‘평가받는 삶’에 지쳐간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평가하는 삶이 좋다는 말은 아니다. 평가하는 것 역시 꺼림칙함을 남긴다. 100%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도 불만의 한 요소이다. 블라인드에서 상사를 나쁘게 평가하여 앙갚음을 당했다는 말을 접하고는 그렇지 않아도 안 좋아하던 인사팀이 더더욱 안 좋아졌다. 인사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외주를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절대적으로 비밀이 보장되는 독립기관에 말이다. 아 진짜 마음에 안 든다.

상하좌우 모두를 평가하지만 비밀이 완전보장되지 않으니 불편하다. 이런 것까지 고려해야 하나 싶다. 그래도 최대한 공정히 나름의 기준으로 평가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왜곡 보고 하는 사람, 다른 사람 말을 듣지 않는 독불장군,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개선 사항에 의견을 적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비밀보장이 되지 않는다고?라는 제도의 허점에 한숨이 나온다.

만약 평가를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서로 업무로 얽혀있지 않는다면 사실 ‘타인의 삶’을 간접 체험하거나 엿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진진한 일이기도 하다. 지하철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통화내용이 흥미로운 것도, 소설과 영화가 인기를 끄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의 얘기 아닌가.

특히 정해진 틀에 박힌 회사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판타지물은 신선한 활력을 준다. 중드의 역사물처럼 시간 여행을 하거나 추리소설처럼 긴박한 사건을 쫓는 것은 팽팽한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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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그림을 봤을 때, 나는 얼굴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그 선비에게 완전 감정이입이 되었다. 쥘부채를 펴고 한 손으로 마루를 짚은 채 마당의 화분을 바라보는 그. 그의 뒤로는 빼곡한 서가가 보인다. 그가 읽고 있던 책은 내가 읽는 것 같이 피로 얼룩진 추리소설은 아닐 수도 있으나 옛 성현들의 지혜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나서 그는 잠시 ‘여가’를 즐기고 있는 듯 보인다. 눈의 피로도 풀 겸 녹색의 잎이 달린 두 개의 화분이(하나는 작약 같기도) 오늘 그의 독서여가에 함께 한다.

차분히 앉아서 그는 앞서 읽은 책의 내용을 곱씹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공자가 제자와 나눈 대화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공자가 살던 시대와 지금 그가 사는 시대는 다르니 뭔가 다른 점이 있으면 고쳐야 하는 것은 아닌지를 곰곰이 생각할 수도 있다. 공자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고 왜 그런 헛소리!를 해서 지금 그의 처지를 더 난처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깊은 상념에 빠져 있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 선비도 지금 막 누구를 종사품으로 올릴 것인지를 의견 개진을 하고 왔을 수도 있다. 뭔가 나처럼 마음이 께름칙한 순간을 겪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도 책 속에서 의견을 구하며 객관화하며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정의 파고를 누그러뜨리고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쉼표, 잠시 숨을 가다듬고 생각할 ‘틈’이 필요하다. 독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가’ 인지도 모른다. 전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때때로 ‘브레이크’인 것처럼 말이다.

과연 정선이 그린 저 선비의 표정은 어땠을까 궁금하다. 나처럼 평가의 계절을 겪으면서 썩소를 날리고 있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