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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May 01. 2021

그래도 봄날은 온다

라 프리마베라-산드로 보티첼리, 1478년경

르네상스 시대에 매료되어 있던 나는 피렌체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중에서도 ‘우피치 미술관’에 가는 날이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웅장한 돔을 보는 것보다도, 피렌체 티본스테이크를 먹는 것보다도 나를 더 설레게 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스테이크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천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저 같은 범인[凡人]이 뭐라고요? 헤헤) 우피치 미술관에는 내가 보물처럼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미술에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재능이 없는 쪽에 더 가까웠다. 

‘색은 눈에 보이는 한 가지 색깔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란다. 보렴. 저 기와의 색깔도 검은색으로 보이지만 아니지? 갈색, 청색, 붉은색이 오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거야.’ 고궁으로 간 사생대회에서 온통 까만색으로 지붕을 칠한 내 그림을 보고 5학년 담임 선생님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줬다. 그렇게 지붕 색만 바꿨을 뿐인데 내 그림은 무척이나 세련되어 보였다. 그렇게 미술의 마술적인 순간을 경험하고 나서도 미술에 격렬한 흥미를 느낄 수는 없었다.

중학교 때의 데생은 나를 더욱 절망으로 떨어뜨렸고 고등학교 때에는 입시에 치여 미술시간은 잘 기억도 안 난다. 하지만 대학 때 곰브리치의 미술사를 읽고 예술 수업을 듣고 여러 미술책들을 접하면서 나는 비로소 미술의 맛을 알아버렸다. 특히 나의 가슴을 뛰게 한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는 ‘산드로 보티첼리’였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여인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인과는 달랐다. 둥근 미인들과는 다른 '갸름한 날카로움이 언뜻 느껴지는' 미인들. 어쩌면 대다수의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리고자 했던 미인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다름’을 가지고 있는 미인들이었다.

그 다름이 나를 더 강하게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피치 미술관에 가는 날은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가는 날보다 더 긴장했다. ‘드디어 그 이쁜이들을 만나러 가는구나!’ 우피치 미술관의 뱀처럼 긴 줄도 이런 나의 들뜬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물론 우피치 미술관의 인파는 어마어마했고 라 프리마베라가 있는 곳에는 그 보다 더 많은 인파가 군집해 있어 정확한 full-shot을 찍기는 어려웠지만 실제로 라 프리마베라를 봤을 때의 환희와 감격은 전혀 반감되지 않았다. 

이게 그나마 가장 잘 찍은 샷이라는 ㅠ.ㅠ

그림은 상당히 크다. 목판에 템페라로 그려진 이 그림은 무려 크기가 가로 x 세로가 314x203cm이다. 

그 앞에 서면 압도당한다. 등장인물만 해도 10명이다. 스펙터클하다. 

그림의 중앙에는 미의 여신 비너스가 고개를 왼쪽으로 갸우뚱한 채 아름답게 서 있다. 이 사랑의 여신의 눈에 뭔가가 이해가 안 되는 걸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한 채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를 향해 시선을 던진다. 아름다움에는, 사랑에는 이성으로는 풀지 못할 일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 같다. 

베일을 두른 그녀의 황금색 머리는 복숭아빛 뺨과 잘 어울린다. 여성스러움을 강조한 풍성한 주름이 잡힌 하얀색 드레스는 고결한 포스를 내뿜는다. 하얀 드레스 위로 두른 푸른색과 붉은색의 망토는 투톤 컬러의 망토일까? 무늬도 그렇고 색의 배합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그녀의 신발도 봤나요? 전령의 신 헤르메스 빼고는 모두 맨발인 가운데 비너스 그녀는 황금빛 가죽으로 잘 짠 샌들을 신고 있다. 여신의 샌들이라는 것에 동의가 될 만큼 화려한 신발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들이 아닐 수 없다. 그저 감탄, 경탄.

그녀의 위로는 버금딸림 동반자 에로스가 눈을 가린 채 화살을 들고 세 명의 미의 여신들을 조준하고 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맞추기 힘든 것을 눈을 가리고 조준(?)하고 있다. 눈먼 사랑, 어리석은 사랑에 이 세 명의 여신 중 누군가가 희생될 참이다. 하지만 사랑의 본질이 그런 것이 아닐까. 눈이 멀고 한없이 어리석기만 한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면 그녀는 희생이 아닌 선택을 받은 것일 수도 있겠다. 

세 명의 여신들도 미의 여신이어서 그럴까? 비너스와 상당히 닮아 있다. 아마 자매지간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See-through 원피스를 입고 그녀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다. 이 세상에 봄이 온 것을 축하하는 것 같다. 이미 숲에는 봄이 한창이다. 꽃이 핀 것도 모자라 열매를 맺은 나무가 이들을 둘러싸고 있다. 주황색 과실은 오렌지일까? 꽃이 만발하고 열매가 흐드러지게 열리고. 앞으로 다가올 한 해는 이렇게 신의 축복 속에서 황홀한 일만 일어날 것만 같다.

춤을 추는 미의 세 여신들 좌측으로는 장난꾸러기 헤르메스가 또 홀로 뭔가를 하고 있다. 헤르메스는 전령의 신이자 여행의 신, 상업의 신, 도둑의 신이다.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신을 신은 그가 가지 못할 곳은 없고 훔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는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가는 꾀주머니에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방랑자다. 그래서일까? 그를 표현한 여러 예술작품을 보면서 나는 그가 (대중과 있어도) 항상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지금 여기서도 그렇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모두 축제를 열고 있는 느낌인데 혼자 하늘을 보면서 딴청을 부리고 있다. 두 마리 뱀이 감겨 있는 독수리 날개가 달린 지팡이로 구름인지 안개인지를 만지고 있다. 두산백과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이슬을 내리고 있는 거라는데 음, 그럴 수도 있겠다. 허리에 손을 얹고 이슬을 내리기 위해서 주변의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면 장난 꽤나 치게 생겼다. 부모님 말 어지간히 안 듣게도 생겼다. 고집이 셀 것만 같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가 이 화폭에서 가장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그림은 네이버로 감상해야? ㅎㅎ

화면 오른쪽에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님프 클로리스에게 반해서 ‘수’를 쓰기 일보 직전의 순간이 포착되어 있다. 제피로스는 볼을 크게 부풀려 서풍을 준비하고 있나 보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가 서풍을 가볍고 따스한 미풍으로 묘사한 이후로 제피로스는 온화하고 봄을 재촉하는 '역할'로 많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런 그를 무섭게 느낀 클로리스는 도망치려고 하나 그게 될법한 일인가. 신화에 따르면 쫓고 쫓기는 달음질 끝에 결국 제피로스는 클로리스를 범했다고 한다. 클로리스는 제피로스를 처음에는 오해했으나 제피로스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고 꽃의 여신 플로라가 되었다고 한다. 무서워 도망치는 그녀의 입에서 꽃이 나오고 있고 그 꽃은 꽃의 여신 플로라에게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봄은 누가 뭐래도 꽃의 계절이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산천초목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는 가운데 목련, 벚꽃, 매화, 진달래, 개나리 등 하얗고 노랗고 분홍빛의 꽃 천지가 열린다. 화폭의 밑을 장식하고 있는 꽃들이 보이는가? 붉은 양귀비처럼 생긴 꽃도 있고 하얀 스위트피처럼 생긴 꽃도 보인다. 노란 수선화처럼 보이는 꽃도. 꽃에 일가견이 있다면 좀 더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꽃에 무식한 것도 아쉽지만 그것보다 천생연분을 만나 결혼하고 꽃의 여신이 된 클로리스가 부러울 따름이다. 그녀는 지금 꽃이 화려하게 수 놓인 원피스에 꽃을 한가득 담아서 세상에 뿌리고 있다. 머리에는 화관을, 목에는 꽃목걸이(라기보다는 크리스마스 리스 같긴 하군요.)를 하고 '꽃 플렉스' 중이다. ‘나야 나. 꽃의 여신 플로라라고.’ 그래, 참으로 부럽군요, 당신. 

제피로스가 몰고 온 '바람'은 분명히 새로운 변화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변화를 싫어해서 클로리스처럼 도망친다. 

오지 말아요. 제발.

하지만 의외로 변화는 우리에게 좋은 변곡점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플로라처럼. 기온의 변화로 이렇게 꽃이 만발한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그래서 새로운 변화 앞에서 멈칫 거리는 나에게 들려주고 싶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온화한 서풍이 그런 내 뒤를 밀어줄 거라고.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꽃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래도 봄날은 오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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