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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Jun 20. 2021

미용실의 시간

호구가 되기는 싫어요

“머리가 많이 상했네요.”

그 말에 내 마음도 상했다.

맨 처음 가는 미용실에 가서 듣는 말은 항상 이 말이다. 

머리가 많이 상했네요. 

내 경험상 처음 간 미용실에서 그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은 진짜 싸게, 공장식으로 눈이 핑핑 돌아가게 바빴던 압구정동의 ‘사자헤어’가 유일했던 것 같다.

그 외의 다른 미용실들은 한결 같이 나를 앉혀 놓고 커트보를 두른 후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말을 내뱉었다. 거울에 비친 나와 미용사는 순간 시선이 마주친다. 나는 뭔가 내가 관리를 잘 못 한 것처럼 자책을 하거나, 혹은 이전에 다녔던 미용실이 내 머리를 잘 관리해주지 않은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하게 된다. 둘 다 유쾌한 감정은 아니다.

이다음에 나올 말을 뻔하다.

“영양이나 클리닉을 해야겠는데요?”

이 말이 나오면 나는 내가 호구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뭔가를 하긴 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정확히 영양이나 클리닉이 뭔지, 나는 전혀 모른다. 그만큼 미용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문적임과 동시에 장막에 가려져 있는 부분이 많다. 얼마 만큼 좋은 재료를 쓰는지, 일반과 프리미엄은 진정 일반과 프리미엄의 가격 차이만큼의 퀄리티 차이가 나는 것인지 소비자인 우리는 당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먼 옛날에는 '탈모' 고민만 있지 않았을까

소비자의 입장에서 가장 싫은 것은 내가 ‘호구’가 되는 일일 것이다. 뻔히 싸게 살 수 있는 물건을 비싸게 사거나, 판매자의 감언이설에 속거나, 비싸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 앞에서 침 튀기며 설명하는 판매자의 눈치를 보면서 지갑을 열거나. 상황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물론 온라인 쇼핑이 활성화되면서 대면 판매의 호구 상황은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클릭 한 번으로, 가격 검색으로 부지런히 클릭품을 팔면 스스로 ‘호구’가 되는 상황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사실 가장 좋은 것은 가격 검색 사이트에서 모든 판매 사이트의 가격 검색이 가능한 것인데 이는 또 대형 쇼핑 플랫폼 중 일부가 판매 가격을 오픈하지 않으면서 개별적으로 더 알아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아, 끝나지 않는 클릭질이여.)

하지만 이렇게 ‘투명’ 하지 않은 거래는 여전히 도처에 존재한다. 투명하지 않다는 것은, 온라인 사이트처럼 가격 옵션이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다. 미용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미용사 개인의 기량에 따라서 커트/펌 등의 가격이 정해지기도 하고 어떤 곳은 기장 추가를 받는 곳도 있고 어떤 약을 쓰는지는 모르지만 다양한 머리 영양 관리 코스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용실은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곳이다. 코로나 때문에 안 간지 1년 정도 되었지만 계속 안 갈 수는 없다. 매일매일 머리는 길고 그 머리를 손질하는 것은, 헤어스타일을 완성하는 것은 온라인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어스타일은 중요하다. 외모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 이상은 되지 않을까? 미용실에 다녀온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차이를 여성분들이라면 모두 느껴봤을 것이다. 미묘한 차이, 살짝의 볼륨감, 드라이로 정리된 상태는 집에서는 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물론 요즘 다이슨 등 다양한 미용기기들의 발전으로 손재주가 뛰어난 분들은 가능하겠으나(한없이 부러워지는 금손..) 나와 같은 곰손은 어차피 안되는 거,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왠지 까다로울 것 같은 고객, 난 이 정도는 아닌데.

한 때는 어떤 헤어 스타일이 나올까? 두 근 반 세근반 하며 미용실을 드나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나에게 어울리는 남자보다 나에게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 솔직히 더 궁금했다. (헤, 생각해보니 지금도 그렇다. 아직도 나에게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 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타고난 멜라닌 색소 부족으로 흰머리가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하면서 나의 미용실 라이프는 아주 단순해졌다. 염색은 머리카락에 어떤 식으로든지 부담을 주는 행위이므로(아무리 헤나 염색이니 물 염색이니 해도 기본적으로는) 필수 불가결한 염색 외에는 다른 행위는 스스로 엄금하고 있다. 그러니 펌이 들어올 여지는 없다.(그나마 머리에 곱슬기가 있어서 다행이야.) 항상 손상된 부분을 다듬는 커트 정도가 나의 스타일 변화다.

그러니 점점 미용실과는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미용실에 들렀는데 미용실에서의 유쾌하지 않은 시간에는 변화가 없어서 한숨이 푹 쉬어졌다.

‘그냥 가던 곳에 갈 걸 그랬네.’

나의 머리 상태를 잘 알고 내 취향을 알고 서로 암묵적인 룰도 존재한다. 그래서 굳이 번거로운 설명도 필요 없고 ‘늘 하던 식으로’ 단골 미용실에서의 진도는 자연스럽게 쭉쭉 앞으로 나아간다. 불쾌할 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내 단골 미용실도 처음에는 낯설었다. 나를 호구로 생각하는 거 아닌가? 비싼 것을 하지 않는다고 방치하나? 등등의 다양한 생각은 여느 미용실의 첫 방문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격이나 모든 것을 하고 났을 때의 머리 상태 등이 나쁘지 않아 합격점을 주고 다녔는데 집에서 너무 멀기도 하고 그 날은 외근 회의가 일찍 끝난 것도 있어서 그냥 집 근처 합리적인 가격대의 미용실에 간 것이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서 머리가 상했다는 그 말이 미용사의 입에서 나온 순간부터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냥 가던 곳에 갈 걸.’

나는 '일반' 염색에 떨리는 마음으로 '영양'을 신청했고 '커트'를 받았다. 속으로는 내가 또 호구가 된 것은 아닐까, 프리미엄을 하지 않은 나를 방치하는 것 아니냐! 는 의심을 되풀이하면서.

백신 접종이 시작되어 사람이 많았다는 설명과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사과, 그리고 카드를 받아 드는 미용사의 손가락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것을 보면서 괜히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손은 어쩌면 표피가 꺼슬꺼슬 일어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까맣게 짧아진 머리카락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여기도 자주 다니면 나의 단골이 될까? 그러면 최소한 불쾌한 시간은 줄어들 수 있을까. 그리고 호구가 되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싫어하는 지를 다시 한번 몸서리치게 깨닫는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물건을 팔 때 상대를 호구로 만드는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불문율임을 가슴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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