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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Jun 27. 2021

반복되는 수많은 연습 후에

발레수업-에드가 드가, 1874년

골프 연습을 시작한 것은 친구 따라 강남 잘 가는 나의 특성상,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서였다. 아디다스 골프화도 사고 골프채는 엑스트론 중고로 풀세팅을 하고 Indoor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서초구 한복판에 어떻게 그런 좋은 곳에서 시작을 할 수 있었는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그 연습장이 훌륭하다는 생각도 못했다. 처음이니까 기준점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똑딱이, 하프, 풀스윙을 7번 아이언으로 하고 드디어 드라이버를 칠 차례가 되었다. 엥? 근데 나는 드라이버를 잘 치지 못했다. 채가 길어지면서 이상하게 리듬이 안 맞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비거리가 뻥뻥 나갔다. 친구 따라 강남은 잘 가지만 강남이 잘 안 맞으면 가지 않는 것도 나의 특성이다. 나는 드라이버를 계기로 골프계를 떠났다.(라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군요. 그냥 골프연습장을 떠났어요.) 친구들은 잘 치는데 혼자 못 치는 것도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고 그거 아니어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운동은 '쎄고 쎘기' 때문에 전혀 망설임도 없었다.

골프화는 새것이니 중고나라에서 처분했는데, 골프채가 문제였다. 어차피 중고였는데 이걸 또 중고로 팔아?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언니에게 골프 칠 의향을 물어보니 그냥 놔두라고 해서 나는 간단히 언니에게 넘겨주고 골프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년에 코로나 사태를 맞게 되었다. 지인들이 또다시 골프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물론 골프연습장을 떠난 이후로 간간이 주변에서 나에게 골프를 권유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굳건히 거부해왔다. 그런데 작년은 상황이 달랐다. 나도 여행이 막히자 어떤 다른 돌파구가 필요해진 것이 간접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생각했다. ‘일단 언니한테 연락을 해보자. 언니가 쓰거나 팔았다면 난 골프와 인연이 없는 거야. 하지만 그대로 있다면?’

나는 골프를 칠 인연이었다. 언니는 나에게 받은 그대로, 한 번도 안 쓰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언니도 참.) 그래서 골프채는 다시 나에게로 컴백했다. 이번에는 회사 근처의 지하 연습장이었다. 세상에, 그때 그 Indoor는 천국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으로 배운 것은 안 잊어먹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골프채를 쥔 순간, 나는 어떻게 그립을 잡는지조차 까맣게 까먹었다는 것을 깨닫고 망연자실했다.(그때 난 몸으로 배운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요새는 성실하게 연습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연습장을 회사 근처로 잡은 것도 집 근처라면 가기 싫은 유혹이 너무 커서 그랬던 것이다. 회사를 가는 날이면 일단 연습한다. 30분이든 40분이든.

“어깨 힘은 왜 들어가 있는 거예요?”

난 깨달았다. 살보다 더 빼기 어려운 것이 ‘힘’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공에 반응한다고 한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그걸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르겠다.(이것이 프로님이 해줘야 하는 역할은 아닌지?) 아 진짜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 계속되고 있는 요즘이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 운동인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는데.(그죠?) 게다가 나이 들어서 시작해서 그런지 이전에는 없었던 손가락 통증도 생겼다. 20대에는 몸에 아무런 통증도 없었는데. 밤이면 호랑이 연고를 바르면서 생각한다. ‘내일은 꼭 새를 죽이지 않고 잡는 것처럼 힘을 풀고 그립을 잡아야지.’ 

내가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 나를 위로한 그림이 있으니 진짜 '팔딱팔딱' 뛰는 발레수업이다. 에드가 드가의 그림은 ‘환상적’이다. 특히 무용수들을 그린 그림을 보고 있으면 더 강하게 그런 인상을 받는다. 튀튀의 표현, 조명을 받아 빛나는 무용수의 얼굴, 몸짓, 무대의 긴장된 공기를 고스란히 화폭에 담은 그의 그림은 발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발레 수업은 실제로 수업이 진행되는 상황을 포착한 것 같지는 않다. 수십 명의 발레리나들이 제각각 ‘딴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왼편의 등을 긁고 있는 발레리나는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이다. 무대에서 점프를 하고 턴을 수십 번씩 하는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발레리나의 모습과는 대비되는 일면이다. 머리카락이 옷 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그럼 굉장히 간지러운데. 옆에 있는 발레리나가 도와주면 좋을 텐데 그녀는 지금 부채질을 하면서 선생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발치에 있는 강아지를 보면서 파리 오페라좌에서도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스코트처럼, 아니면 발레리나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다면 좋은 전략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 있는 선생은 당시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유명했던 쥘 페로라고 한다. 선생은 나이가 지긋한 것 같다. 가만히 살펴보니 앞에 있는 한 명의 발레리나를 지도하는 듯하다. 그녀만은 진지하게 포즈를 취하며 선생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발레리나들은 귀걸이를 만지고 머리 장식에 신경을 쓰고 친구와 잡담을 나누고 있다.

“너 이번에 그 역할에 도전할 거야?”

발끝을 세우고 팔짱을 끼고 앉은 쟌느가 이자벨에게 묻는다.

“응, 오디션을 봐야지.”

“쉽지 않을 텐데. 저기 샬럿도 한다는데.”

순간 이자벨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개인 교습을 더 해서라도 꼭 하고 싶어.”

화면 뒤쪽에 앉아 있는 그 둘을 보고 있자니 나는 영화 블랙스완이 생각난다. 블랙스완이 그렇게 무서운 영화인 줄 알았다면 나는 안 봤을 것이다. 정말 무서워서, 오금이 저려서 혼났다.(안 보신 분들을 위해서 이만해야겠다.) 각설하고 무대 위의 한없이 아름다운 발레 공연, 그 발레를 해내는 발레리나들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다. 보통으로 닿을 수 없는 절대미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화장실도 안 갈 것 같다. 하지만 그들 역시 수없이 연습하고 노력하고 쉴 때에는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다. 연습이 지루하면 하품하고 딴짓을 한다. 특히 솔리스트가 아닌 군무를 하는 발레리나들은 더 심하지 않을까? 나는 언제쯤 솔리스트를 할 수 있을까? 날고 기는 저 솔리스트들이 부상이라도 당하지 않는 한 나에게 기회는 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팔짱을 끼고 싶을 만큼 시니컬해지는 감상에 젖는다 해도 탓할 수 없을 것 같다. 정말 수업을 듣고 연습하면 되는 것일까? 

그래서 드가의 여러 작품에서 그려진 연습하는 발레리나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동질감을 느낀다. 완벽을 위해서, 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수련하는 일은 꼭 발레가 아니더라도 신성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다. 내가 하는 일도 그렇다. 아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그렇다. ‘더 잘하고자 하는 의지’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하지만 그런 과정 중에도 우리는 스스로 묻는다. ‘과연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인가. 노력해서 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나에게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발전을 멈추는 순간, 발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접는 순간이 곧 사멸하는 순간이라고. 그래서 내가 드가의 발레 그림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그가 어느 정도 여성 혐오론자였다는 사실도 참 흥미를 끄는 대목이기도 하다.)

내일 골프 연습장에서 나는 다시 그립을 잡고 김효주의 물 흐르듯 아름다운 스윙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몸을 돌려볼 것이다. 내가 그리는 스윙의 궤적도 발레리나의 궤적만큼이나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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