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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Aug 07. 2021

사기를 당하더라도 미래는 알고 싶어요

점쟁이-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16세기경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렇게 성호를 긋는 이유는 가톨릭 신자인 내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행위들이 교회법에 따르면(아마도) 엄청난 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은 다른 신을 믿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점’을 보는 것도 그에 해당한다. 물론 내가 본 점들이 ‘신점’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죄가 경감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은 점을 보러 다니지는 않지만 20대에는 미래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지금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으니 이제 더 이상 미래에 관심이 없게 된 걸 수도……) 도대체 앞으로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인생은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 연인은 어떤 사람일까. 앞으로 이 직장을 계속 다니게 될까? 사업을 할 운명은 아닌가? 돈복은 있는 것인가? 건강은 또 어떤가?

멍하니 시간이 남아돌면 궁금증은 더더욱 강해졌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면 주변에 점을 보러 다녀왔다는 지인들은 널려 있었다. 아마 그들도 나처럼 미래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점이 맞았던 것 같지는 않다. 일부는 맞았고 일부는 빗나갔다. 기본적으로 나의 생년월일을 말해주고 본 것이었으니 역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았을까. 역학은 또 뭐냐. 중국의 유교 경전 중의 하나인 ‘주역’에 바탕을 둔 학문이다. 주역은 ‘점복(占卜)을 위한 원전(原典)과도 같은 것이며, 동시에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흉운(凶運)을 물리치고 길운(吉運)을 잡느냐 하는 처세상의 지혜이며 나아가서는 우주론적 철학이기도 하다’는 것이 두산백과사전의 설명이다. 우주론적 철학, 이 세상은 기의 흐름으로 움직이고 그 흐름을 잘 활용하는 철학. 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바닥을 칠 때에도 언젠가는 좋아질 것을 믿고 정상에서도 이 흐름이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을 염두에 두는, 어찌 보면 상당히 성숙한 철학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건 또 딱히 철학일 뿐, 종교의 영역은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든다

다시 얘기를 되돌려서 그들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이미 결혼도 했어야 하고 자식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얘기는 모두 ‘아직은’ 사실로 드러나지 않았다. 흠. 오히려 나에게 ‘점’이라고 하면 더 섬뜩한 기억이 있다.

친구와 야근을 마치고 며칠 전에 수소문해둔 타로카드 점을 보러 갔다. 당연히 우리의 관심사는 일과 사랑이었다.(참으로 진부하기 짝이 없군요.) 때는 초봄이었다. 봄밤에 우리는 또 폭설 같은 업무에 압사당할 것 같은 심정으로 회사를 탈출하여 걸음을 빨리 하며 그녀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약속 시간에 간당간당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길래 좀 일찍 나오고 싶었지만 업무량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은 타로카드를 봐주던 그녀의 얼굴도 그 오피스텔의 분위기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가 뽑았던 카드 중의 한 장이다. 내가 뽑은 카드에는 사람의 등에 칼이 무수히 꽂혀있었다. 카드를 뽑아 뒤집는 순간, 뭔가 불길했다. 저렇게나 많은 칼을 등에 꽂고 있다니. 많아도 30대를 넘지 않았을, 나와 동년배로 보이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건강에 유의해야 합니다.”

건강? 타고난 건강체인 내가?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답답한 듯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 카드는 몸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다못해 맹장염 수술이라도 하게 될 거예요.”

맹장염이라. 그래서 그날 오피스텔을 나오면서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보통은 다른 점을 봤을 때에는 웃으면서 이건 저렇고 그건 그런 거다 라고 얘기할 수 있었는데 도통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해가 가기 전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죽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고였다. 당시에는 전혀 이 타로카드와 나의 사고를 연관 지을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몸을 회복하고 수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문득 이 타로카드가 생각났다. 그리고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누가 나한테 타로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을 할까? 사람들은 뽑는 나의 기운이 작용하는 거라고 하던데 결국은 나의 기운이 그것을 뽑은 거라면 스스로를 믿는 것이 되는 건가. 그 질문에 나는 나의 경험담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다른 2개의 카드는 기억나지도 않지만 일단 난 내가 뽑은 한 개의 카드와 그 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사고를 겪고 나서는 ‘점집’에 가지는 않았다. 성당에는 열심히 나갔다. 그리고 ‘타로카드점’은 나에게 하나의 무서운 계시로 다가왔다. 다른 점에 홀릴지언정 타로카드를 볼 일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지인 중에 타로카드를 본다는 사람이 있어서 친구 집에서 심심풀이로 또 카드를 뽑게 되었다.(이런 분위기에서 정색하고 '난 안 뽑을 거야'라고 말하지 못하는 게 나의 st.) 이번에는 (역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사자를 길들이는 카드에 모든 것이 상당히 ‘좋은 그림 카드’들로 뽑혔다. 그녀의 해석에 따르면 일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겠지만(그놈의 사자ㅠㅠ) 능히 내가 감당하고 감내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음, 과연 그럴까요?)

그래서 나는 이 그림 속 앳된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그의 얼굴에 드러나 있다. 힐끔 곁눈질로 점쟁이를 바라보면서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얼마나 애가 타고 있을까? 르네상스 화폭의 초절정 미남미녀들이 아니어서 더 감정이입이 잘 된다. 결코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청년과 결코 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여인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을 보고 있자면 내 주위 지인들의 얼굴이 포개진다. 여인은 점을 봐주는 척하면서 남자 손가락의 반지를 가로채고 있는 거라니 어쩌면 점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울리는 경종일 수도 있겠다. 미래가 궁금한 남자와 그를 속이려고 눈치를 살피는 여자의 서로 다른 속내가 화폭에 아름답게 펼쳐진다. 카라바조를 후원했던 델 몬테 추기경이 사랑한 작품이라고 한다. 점을 보는 장면에서 또 사기를 치는 그림을 사랑한 추기경이라니. 델 몬테 추기경을 만났다면 그는 분명 평신도인 나에게도 솔직 담백하게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성직자가 아니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점쟁이라는 제목으로 두 개의 그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루브르에 있는 작품은 이 작품보다 여자의 풍채가 더 좋다. 점쟁이가 더 노회 한 느낌이 난다. 반지를 어떻게 빼낼까 고심하는 눈치도 없다. 모든 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연출할 것만 같다. 몸을 극적으로 움직이지도 않고 시선과 세치 혀로 고객을 완벽하게 ‘요리’해버릴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루브르에 있는 여자 점쟁이보다 이 그림을 더 사랑한다. 눈치를 살피는 점쟁이의 기색이, 어떻게 속일 것인가를 가늠하는 그녀의 표정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색감의 콘트라스트도 더 좋고 인물의 몸짓과 표정도 더 생생하다. 카라바조의 성향이 더 잘 드러나 있는 작품 같다. 

로마 미술관에서 그림을 발견하고 반갑게 찍었던 기억이......

이제 다시 점집에 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나의 욕구는 설사 반지를 빼앗기는 출혈이 있다 하더라도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타로를 보는 지인이 옆에 있는 한, 연말이면 토정비결 링크를 보내주는 친구가 옆에 있는 한, 나는 타로 카드를 뽑고 링크를 누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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