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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Jul 11. 2021

커피, 좋아하세요?

전 없으면 못 삽니다만

커피를 처음 마신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그때는 당연하게 노란 맥심 커피를 마셨다. 공부하는 중간중간, 커피 한잔을 마실 때에는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공부의 끝은 있을까.

그 공부의 끝은 대학이었다. 대학 캠퍼스에서 마시는 커피는 자판기에서 뽑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밀크커피, 블랙커피, 그때는 특이하게 자판기에 ‘우유’도 있었는데 블랙커피와 우유를 섞어 먹는 것이 그냥 밀크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맛있었다. 아침에 몽롱해진 머리를 깨울 때, 점심밥 때문에 잠이 쏟아질 때, 저녁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해야 할 때, 자판기 커피는 나의 동반자였다. 커피를 뽑아 들어야, 비로소 뭔가 일이 시작되었다. 

직장에 들어가니 노란 맥심 커피가 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종이 커피에 맥심 한 봉지를 넣고 빈 봉지를 스푼 삼아 휘휘 저어서 너도나도 마셨다. 흡사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빈도였다. 아침 한 잔, 점심 먹고 한 잔, 야근할 때 또 한 잔. 여전히 나는 틈틈이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특히 사람이 없는 텅 빈 사무실, 홀로 야근을 할 때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일을 해야 하는데 일은 되지 않았다. 

일단 커피가 놓여 있으면 나는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어쩌면 나에게 커피의 가장 큰 효용은 이 잠깐의 휴식, 일상을 pause 하는 것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커피를 사랑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정신없고 숨 가쁜 일상 속에서 그나마 마음을 다잡고 생각할 ‘틈’을 제공하며 바람을 쐬듯이 사고를 전환시켜줄 계기를 만들어 주는 존재. 그래서 나는 커피가 좋았다.

그러다가 회사 앞에 스타벅스가 무려 2층으로 널찍하게 들어왔다. 우와, 이게 뭐야? 유럽의 작은 카페와도 다른 스타벅스, 일단 그곳에 가면 분위기가 끝내줬다. 회사와는 다른 여유가 철철 흘러넘쳤다. 그곳에 가면 갑자기 대한민국이 외국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브라운톤의 인테리어도, 테이블과 의자도, 커피 일러스트도 모든 것이 멋스러웠고 세련되었다. 그래서 나의 최애 장소로 거듭나게 되었다. 약속은 무조건 스타벅스였다. 커피 취향도 맥심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돌체 라테며 카푸치노며 에스프레소 커피 맛에 혀는 천천히 길들여졌다.

Good Feels Good

그 후로 대한민국은 각양각색의 커피 천국으로 변해갔다. 한 때는 던킨의 커피도, 맥카페의 커피도 괜찮던 시절이 있었다. 투썸플레이스의 커피도 좋아했고 요즘은 990원 커피 중에서도 내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만날 때가 있다. 낮은 빈도이긴 하지만.

그럼 나는 어떤 커피 맛을 사랑하는가. 맥심 커피에서 스타벅스로 이행하던 시절에는 '아메리카노'는 꿈도 꾸지 않았다. 우유가 들어간 라테 류에서 나의 메뉴는 정해졌다. 그러다가 서서히 나는 아메리카노를 선호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커피 본연의 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매일 밖에서 커피를 사는 것도 귀찮아 원두를 내려마시던 적이 있었다. 브라질, 자메이카, 블렌드 된 원두, 이것 저것 헤매다가 내가 찾은 원두는 ‘인도네시아 만델링’ 원두였다. 그 강한 풍미가 나에게 맞았다. 그런데, 그런데 만델링 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내가 사랑하던 브랜드의 인도네시아 만델링 원두만 공급이 중단되었다. 오 마이 갓. 그래서 다시 인도네시아 만델링 원두와 최대한 가까운 원두 찾기가 시작되었고 이 원두 저 원두 전전하다가 결국 정착한 것은 카누 다크 로스트였다. 솔직히 커피 전문점 전성시대가 되면서 맥심 커피를 은근히 걱정했다. 그런데 역시 기우였다. 커피 명가 동서식품은 카누로 이미 훌륭했다. 원두를 내릴 번거로움 없이 작은 스틱 하나로 이런 훌륭한 맛을 내다니! ‘내가 동서식품 걱정을 하다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실소가 나왔다. 지금도 내 옆에는 카누 스틱으로 완성된 훌륭한 커피가 텀블러에 소중히 담겨 있다. 

조앤,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집필을 했다고요?

여행을 가건, 사무실에 있건, 휴일이건 상관없이 아침에는 커피를 마시게 된다. 커피는 나에게 하루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커피가 없으면 나의 일상도 움직이지 않는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걸 고급 용어로 중독이라고 하죠?) 그래도 빈도는 줄었다. 나이가 들어서 카페인 민감도가 높아진 것인지 오후에 마시면 잠을 잘 못 자게 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그리고 맛없는 커피를 마시면 화가 나게 되었다. 세상에 맛있는 커피가 얼마나 많은데 이런 숭늉 같은 커피를 마셔야 하지? 이런 생각을 하면 참을 수 없다. 아깝다. 그래서 커피 마시는 장소는 상당히 고심하고 고민해서 고른다. 내가 맛봐서 검증된 곳이면 더 좋고, 하지만 이래서는 커피 세상을 넓힐 수 없으니 지인의 추천으로 커피 맛이 좋다는 카페를 찾아가는 식이다. 거기서도 나는 나의 커피 취향을 분명히 말한다. “저는 다크하고 스트롱한 커피 맛을 좋아합니다. 산미는 싫고 묽은 것도 질색팔색이에요.” 한 마디로 눈살을 찌푸릴 만큼의 강렬한 커피 맛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못 만나는 일리, 이탈리아에서는 우리보다 흔한 듯.

그래서 이탈리아 여행에서 에스프레소를 들이켜는 것이 좋았다. 하루를 시작하기에 그보다 더 상큼한 음료가 있을까 싶었다. 영혼을 깨우는 맛, 그 맛이었다. 적다 보니 빌즈의 롱 블랙도 좋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호주도 언젠가 가서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백신을 맞는다고 해도 호주에 가기까지는, 한참은 걸리겠죠?

이렇게 좋아하는 커피를, 그래도 한 번은 공부해봐야겠다 싶어서 커피 클래스를 들었다. 정동의 루소랩을 좋아하는데(물론 여기 커피도 맛있고 음식도 훌륭, 분위기도 좋다.) 그 회사에서 하는 클래스였다. 

루소의 아메리카노도 다크한 것이 아주 훌륭했다.

커피는 적도 부근에 산지가 분포해 있다. 아프리카부터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브라질이 생산량 1위이고 베트남이 2위이다. 베트남 현지에서 커피를 제대로 안 마셔서 그런가. 베트남 커피도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 놀랍게도 인도네시아도 4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델링 부족이여, 근데 왜 공급이 잘 안 되는 것인가?) 화산질 토양에 높은 고도, 적절한 일교차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군요. 센터컷이 일자면 로부스타, S 자면 아라비카라고 하는데 사실 센터컷이 애매모호한 것도 많아 보였다. 커피 꽃이 신부의 면사포처럼 하얀색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상당히 화사하면서 아름다웠다. 역시 꽃은 아름답다. 그리고 농약을 많이 친다는 사실도. 음. 무농약 식생활을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커피를 안 마실 수는 없다.

원두를 수확한 후 프로세스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풍미가 달라진다고 한다. 자연건조도 있고 세척 건조도 있고 길링 바샤라고 하는 인도네시아 특유의 프로세스도 있다. 워시드 가공 후 수분 함량을 50%까지 건조한 후 내갑피(파치먼트)를 제거하고 생두째 건조하는 방식이라고 하는데 이런 공정을 통해서 높은 바디감과 낮은 산미를 갖추게 된다고. 내가 좋아하는 맛은 이 과정을 거쳐서 탄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공정 자체가 평준화되어 있지 않고 원두의 질이 고품질로 유지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역시 아쉽다. 농가가 영세하고 빨리 현금화를 시켜야 하는 여건도 있다 보니 그런 모양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 가서 만델링 부족이 만든 원두로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실 날도 곧 오겠죠? 

커피 수업의 수확은 커피는 농약을 많이 친다는 깜짝 놀랄만한 뉴스와 나의 사랑 만델링 원두가 왜 그런 풍미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브루클린 뮤지엄 근처 카페, 기대하지 않았는데 맛이 좋았다.

그나저나 참 이상하죠? 왜 비가 오면 커피를 더 마시고 싶을까요? 왜 더 그 생각이 간절해지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커피도 더 맛있다. 비의 마술인가. 날씨가 어떤 마술을 부리건 간에 커피가 영혼을 어루만지는 음료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일 년이면 최소 365잔의 커피를 마시는 나로서는, 그 옛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문득 절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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