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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Oct 23. 2021

월급 징크스

박보검의 ‘별 보러 가자’를 마흔 번은 넘게 들은 것 같다. 그것도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무실. 물론 남은 인원이 한 두 명 정도 있었지만 그들과 내 사이는 너무 멀어서 그들에게 박보검의 목소리가 가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든 좋으니 나와 가줄래.

네게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도 많지만.

너무 서두르지 않을게.

그치만 네 손을 꼭 잡을래.

멋진 별자리 이름은 모르지만

나와 같이 가줄래.


https://youtu.be/rDuB8Irvyhs?list=RDrDuB8Irvyhs

적재의 ‘별 보러 가자’보다 박보검의 ‘별 보러 가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곡 전반에 깔리는 백색소음이 절묘하기 때문이다. 천고 높은 공간에 울려 퍼지는 느린 발소리, 테이블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어딘가를 향하는 기차가 철길을 지나는 소리. 사운드 디자인이 진정 훌륭해서 박보검과 함께 어딘가 떠나고 있는 그 느낌. 진짜 다 확 내팽개치고 별 보러 나선 느낌. 꼭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서정적인 선율과 함께 마음을 사로잡는다.


물론 내가 들은 곳은 사무실이었다. 그것도 불금을 해야 할 금요일에, 불쌍한 금요일이었다. 창밖으로는 어둠이 내려앉고 광화문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슬슬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이거 위에서 하라고 해서 한 것도 아니잖아.”

“위에서 하라고 한 거 아니었나요?”

한 마디는 했다. 위에서 하라고 했으니까. 결국 위에서 내려온 지시는 최악의 결말을 향해서 내닫는 중이다. 그리고 추락하는 것은 브레이크가 없듯이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닿고 있다. 4년 전부터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이리 빼고 저리 빼면서 고사해온 업무였다. 4년이면 올림픽이 열리는 주기다. 그만큼 긴 시간을 버텼으면 버틸 만큼은 버텼다. 이제 더 이상 댈 핑계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검토해서 진행하게 되었다.

위에서 “해!”라고 말은 하지 않았다. 대장동에서 이재명 지사가 돈 한 푼 안 받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시그널로 신호가 오면 누구라도 정황상 인지하게 된다. 더 이상 버틸 수는 없겠구나……


게다가 그 일이 우리 내부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 파트너사가 있는 경우면 더 골 때린다. 파트너사가 특수관계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또 윗분들은 얼마나 네트워크가 넓던지요? 하, 이건 정말 답이 안 나온다. 그들은 파트너사임에도 상전의 포스를 퐁퐁 풍긴다. 상호 동등하게 업무가 진행될 듯하다가도 윗선의 포스 때문에 컨트롤이 쉽지 않다. 왜 돈을 내고 하는 비즈니스인데 이런 불평등 조약과 같은 상태에서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특히 이번에 같이 일했던 회사는 참으로 특이했다. 그 대표라는 사람이. 뭔가에 외롭게 고립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상도의라고 하는 것이 아주 낮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 전에도 비슷한 비즈니스를 다른 여러 회사와 협업을 해봤기 때문이다. 처음이 아니라 케이스를 여럿 가지고 있으니 아무래도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여곡절, 긴 과정을 거쳐서 협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 시작 2주 만에 프로젝트가 엎어질 판이 되었다.

아이고 머리야......

“어떻게 하냐.”

무거운 공기가 회의실을 감쌌다. 사실 선택지는 별로 없다. 

연기, 취소, 그냥 강행. 

연기는 할 수 없다고 하니 손해를 감수하고 프로젝트를 drop 할 거냐 아니면 그래도 그냥 강행하냐의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의사결정은 다음 주에 찬란하게 펼쳐질 예정이다.

설상가상으로 회사 전체적으로 유사한 프로젝트에 대한 전략을 발표해야 하는 것도 다음 주다. 참으로 공교롭다.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설상가상이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는 말도 없다. 입틀막 상황이다.


내 멋대로 ‘월급 징크스’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 달을 주기로 보면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이 하드코어로 변하지?’ 싶어 달력을 보면 월급날 근처다. 월급을 받는 주는 거의 업무가 피크를 찍는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 일은 월급을 받고 나서 일어나서 나를 더 당황케 했다. 월급이 마약이라고 힘들어도, 몸이 망가져도 마약 한 방에 치유가 되는 것처럼 월급날에 통장에 찍힌 그 숫자를 보면서 자위하곤 했는데 이제 그마저도 아니라고? 그럼 난 뭘 의지해서 이 하드코어를, fantastic hell을 헤쳐나가지?


그래서 나는 별 보러 가고 싶어졌다. 긴 하루 보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확’ 그냥 나서고 싶어졌다. 어딘가 숨통이 트이는 곳으로. 꼭 뉴질랜드가 아니라도 좋았다. 그냥 별이 보이는 곳으로, 별이 쏟아지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만 해졌다. 그래서 박보검의 별 보러 가자를 무한 반복으로 듣게 되었다.

내 비록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별 보러 가자를 듣고 있는 처지이기는 하나 언젠가는 진짜 별을 보면서 이 노래를 듣고 있을 거라는 신념을 버릴 수는 없었다.


전에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야근을 다 하고 나면 쇼핑을 하면서 위로를 받곤 했는데 요즘은 야근을 시작하기 전에 쇼핑을 지르지 않으면 야근에 집중할 수가 없다고. 돈을 썼으니 돈을 벌어야 한다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업무를 할 수가 없다고. 회사 오래 다니고 싶으면 대출 끼고 집을 사라는 우스개 소리도 들려온다. 나는, 나는 별 보러 가고 싶어서 이 상황을 견딘다......


그동안 소중하게 지켜온 월급 징크스가 깨진 날, 내 마음도 금이 가는 것 같았다. 이제는 매일매일이 터프함을 뽐내게 될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다음 주는 그럴 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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