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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Oct 03. 2021

제대로 쉼표

김천 직지사 템플스테이

작년 추석, 톨게이트 정체를 몸소 체험한 후라 이번 추석 연휴에는 도저히 운전대를 잡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템플스테이.

내가 템플스테이와 인연을 맺은 지는 15년이 넘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시작했던 템플스테이는 체계적이지 않았고 프로그램도 ‘딱히’ 정형화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간다고 하면 ‘엥? 그런 게 있어?’ 이렇게 되묻는 정도였다.

처음 간 템플스테이가 김천 직지사였다. 직지사는 418년에 창건되어 1600년이 넘은 천년 고찰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지어진 절이라고 한다. 황악산에 자리한 직지사는 규모도 상당하다. 스님들이 수계를 받는 만덕전도 있고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성보박물관’도 있다. 수십 차례 다녔는데 항상 공사 중인 미스터리 박물관이기도 하다. 대웅전 자체도 보물이고 본존불 뒤에 있는 괘불(걸려 있는 불화)과 공양이나 시주를 바치는 대(시주대라고 해야 하나? 본존불 앞에 있는 테이블 같은 거다.) 역시 보물인데 화려하게 나무로 장식되어 있어 ‘과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웅전은 사진을 찍을 수 없어 공개는 불가하다.(음, 와서 보라는?) 비로전도 유명한데 비로전에 있는 천 개의 불상이 크기도 동작도 얼굴 표정도 모두 달라서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만들었는지 놀랍다…… 

그중에서 한 불상만이 서 있는데 이것이 한눈에 들어오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전해져서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물론 난 한 눈은 고사하고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아아아 저기에 있는 저 불상! 하고 찾은 주제라 역시 비로전의 영험함을 몸소 느끼고 있다. 직지사는 특이하게 경내에도 물이 흐른다. 보통의 절이 산을 병풍처럼 끼고 물이 휘돌아나가는 것처럼 바깥으로 흐르는데 직지사는 바깥에도 있고 경내에도 있다. 예전에 어떤 스님이 그래서 음양의 조화인가,, 가 뛰어난 절이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기억력이 음, 미약할 뿐이다.

하늘이 사기로군요.

직지사 외에도 동해 삼화사(여기는 예전에는 촛대바위에서 일출을 보여주는 서비스를 해줬는데 지금도 하는지는 모르겠다.)와 송광사 템플스테이를 했으나 김천 직지사를 주로 이용하게 된 것은 대중교통의 접근성이 뛰어나고 템플스테이를 일찍 한 절답게 운영이 안정적이고 공양이 일미라는 점을 뽑을 수 있겠다(아 침이 고인다......). 물론 부산에 사는 친구와 만나기에 지리적으로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을 수도;

이 창과 처마와 창 밖의 풍경을 떼어오고 싶은 마음. 탐욕인가?-_-;;

직지사 템플스테이 건물 역시 겉은 한옥, 속은 양옥이다. 비가 올 때 특히 방안에 누워서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으면 태어나길 잘했다는 발심을 하게 된다. 그 정도로 아름답다. 가을의 단풍이 들 때에도 아름답고 신록이 돋아나는 5월이면 여리여리한 녹색잎에 마음도 말랑해진다. 겨울에 직지사를 방문한 적은 있지만 눈이 휘날릴 때 가본 적은 없다. 하지만 분명히 눈이 내릴 때에도 상당히 아름다울 것이다. 한옥은 어떤 계절에 있어도 존재감이 드러나니까.

마침 꽃무릇(상사화)이 한창일 때였다. 이렇게 많이 다녔지만 꽃무릇이 한창일 때는 처음이었다. 일주일이 절정이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군락이 장관을 이루었다. 이 꽃이 상사화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데에는 꽃이 필 때에는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에는 꽃이 피지 않아 서로 만날 수 없다 하여 상사화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하니 낭만 쩔지 않을 수 없다. 잎이 없는 녹색 줄기에 빨간 꽃이 어찌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지 사진을 찍어도 합성사진 같았다.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꽃이 된 상사화

코로나 이후로는 걸음을 하지 않았으니 거의 2년 만에 찾은 셈이다.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들과 일주문은 익숙했고 전각들도 변함이 없었지만 꽃무릇도 처음이었고 화엄일승법계도도 처음이었다. (직지사도 많은 노력을 하는구나.) 처음에는 ‘미로’라고 생각했으나 의상대사가 화엄경을 정리한 것을 54각의 도장 문양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신기한 것은 어디에서 시작하든 길을 따라서 걷다 보면 시작한 지점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때는 마침 조화처럼 보이는 서양 봉선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계절, 꽃무릇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며 걸었더니 역시 처음 그 자리네?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빠져나왔다.

임파첸스, 서양 봉선화인데 이 꽃 역시 처음에는 조화인 줄 착각할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지도법사 인월 스님의 말씀도 좋았다. 차담을 하는데 스님이 항상 공부하고 생각하며 진리를 구하는 구도자라는 것이 느껴지는 말씀이 줄지어 나왔다. 덕분에 좋은 책 소개도 받고 대만에서 지인이 선물로 주셨다는 과자도 먹을 수 있었다. 페이스트리는 부드럽고 안에 든 것은 밤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었다. 펑리수보다 백만 배는 맛있었다. 스님께 브랜드를 물어볼 것을 ㅠ. 스님의 얼굴은 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MSG를 안친 얼굴'이었는데 세속에서는 보기 힘든 얼굴임은 분명했다. 맑고 밝은 그 기운, 여기서 속세와는 다른 패턴의 생활을 하기에 가능한 거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속세에서도 가능할까?).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님의 맑은 얼굴을 떠올려야겠다. 

오래간만에 속세를 떠나 걷고 쉬고 자고 먹고, 쉼표를 '제대로' 찍었다. 

에스키모인들은 화가 나면 화가 풀릴 때까지 걷는다고 한다. 어떤 날은 짧을 것이고 어떤 날은 밤이 이슥하도록 못 돌아올 정도로 길 수도 있다. 옛 선조들의 방법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축적된 지혜를 거저 얻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 방법도 그랬다. 내 안에 화가 많은 것도 결국은 나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보려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마음을 비우고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은 오유지족, 내가 스스로 만족하는 것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나에게 선물과 같았던 템플스테이에 오유지족한다. 

마지막으로 템플스테이와는 상관없지만 근처 사명대사 공원 안에 있었던 카페 밀은 뷰 맛집에 베이커리 맛집이었다. 호두마카다미아 브래드(호두가 김천이 전국 생산량의 70%인가를 생산한다고 하네요.)가 명불허전이다. 시그니처 커피가 모카크림라떼인데(이태원 챔프커피에서 시그니처 아닌 아메리 먹었다가 폭망한 이후로는 항상 시그니처 드링킹) 아이스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시그니처여서 마심. 크리미한게 맛이 좋다. 하지만 호두마카다미아와 마시기에는 둘 다 ‘달달’이라 밸런스는 안 맞을 듯. 직지사 주변은 날로 뭐가 새로 생기고 확장되는 느낌이다. 제행무상이로군요.

야경이 더 멋질 것 같은 카페 밀의 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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