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산책 May 12. 2020

광주에서 살아남기

각자 스스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떠났다.

20년 넘게 살았던 곳을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가장 크게 다시 내가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동기들말고는 마음놓고 이야기하거나 친하게 지낼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때 그리고 주변에서 대학 동창 모임, 초등학교 모임, 고등학교 모임을 하고 모임 관계속에서 때로는 사람으로 일이 이루어질 때 가장 힘들었다.


"협조전으로 오늘까지 이 일에 대해서 회신해 달라고 협조 요청 했는데 아직..."

"그 팀장 내 고등학교 후배인데 걱정마 내가 전화해 놓을께"


 업무라는 것도 중국어로 "꽌시"라고 하는 관계가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을 하는 것은 그 동안 쌓인 신뢰와 관계가 때로는 절차대로 하는 것보다 빠르고 편하며 효율적이었다. 그래서 관계를 위해서 술도 자주 마셔야 하고 자주 어울려야 한다는 것을 듣고 듣고 또 들었다.


답답했다. 그냥 답답했다. 회사 사람들을 만나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퇴근하고 술을 마시고 내 관계는 회사사람들과 동기가 전부였다. 주말에는 그래서 고향에 다녀왔다. 하지만 그렇게 금요일 저녁 퇴근을 하고 막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 집에 도착한 이후 일요일 오후 다시 고속버스를 타기까지의 시간은 정말 순간이었다. 그렇게 일요일날 버스를 타는 것이 싫었다. 톨게이트를 보는 순간 고민과 고민을 했다. 이대로 버스가 하늘로 올라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점 집에 다녀갔다 오기도 힘들어졌다. 주말에도 출근할 일이 점점 많아졌다. 신입사원이고 모르는 것도 많고 주말에 나와서 내 손으로 내 몸으로 하나하나 알아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내 손에 기름을 묻혀가면서 내 손으로 나사를 풀어보고 열어보고 알아가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점점 더 피곤과 회의도 함께 더해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는 이 간판의 글이 정말 마음에 새겨지는 때가 있다.

폭발하기 전에 고요, 아래층에 사는 동기 하나가 방에 들어왔다.

"너는 요즘 뭐하냐?"

"나 가끔 중국어 스터디 나가"

"중국어 할 줄 알아?"

"응 조금"


이 친구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한다. 나사실 입사할때 뭐라도 남들과 달라보일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뭔가를 나도 중국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중국 시장은 성장할것이고 회사에서도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하면 뭔가 장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공대생이 중문과앞을 몇차례 왔다갔다 했다. 그러다가 보기좋게 1학년들과 수업을 하면서도 성조하나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기말고사를 칠 자신이 없어서 "F"학점을 받았다. 그렇게 "F"학점을 받았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 성조를 공부하기 위해서 학원도 다니고 단기로 있는 중국문화연수도 다녀왔다. 문화연수는 동기부여를 하고 싶은 생각에 다녀왔는데 동기부여는 확실하게 되었다. 그렇게 회사 면접에서 중국어로 자기 소개까지 할 수 있을정도가 되었다.


"모임 어디에서 하는거야?"

"다음 모임에 나도 같이 가도 될까?"

그렇게 시간이 허락하는 주말 중국어 모임에 나가서 그동안 놓고 있던 중국어를 다시 공부했다.

그렇게 전남대 캠퍼스를 찾아가게 되고 이 인연으로 방송통신대학교 중문학과도 졸업하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는 나름 요란했다. 나는 회사 외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광주는 문화의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 음악, 공연, 관심사들이 하나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 광주는 모두 처음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