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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스크 Dec 15. 2022

늙어서도 사서 고생

이번엔 내 차례야

 대학 시절에 또 이후에 필요한 과정을 이수할 때.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을 보면 항상 놀라웠다. 한참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열심히 공부하시는 중년의 또는 노년의 만학도들.

 '우와! 나는 지금도 공부하기 싫어 죽겠는데 저 나이에도 이런 열정이 있으시다니!'

대단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결혼 후 남편은 급작스레 유학을 준비하고 싶다고 했다. 연애 때 어렴풋이 박사과정을 하고 싶어 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미국 유학까지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회사 생활 7년. 곧 과장 승진이 얼마 남지 않은 아저씨의  미국 유학 도전이라니. 게다가 나는 연고도 없는 곳에 남편의 직장과 가깝다는 이유로 신혼집을 구하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이직을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남편 따라 미국을 갈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처음부터 두 팔 벌려 환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나 미련 같은 것들을. 남편에게는 동반자의 동의가 필요할 텐데 내가 반대한다면 그의 가슴 한편에 계속 후회로 남으리라는 것을.






 남편에게 1년의 시간을 주었다. 그 안에 준비하고 합격하면 가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남편의 목표는 뚜렷했고 연애 기간 동안 보여준 그의 모습에서 원하는 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쟁취해내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후 남편은 직장과 영어시험 준비를 병행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남편은 국내 출신이었지만 해외 경험이 많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해왔었다. 영어점수를 만드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다. 20대 때와는 전혀 달랐다. 밤을 새우고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데 체력적으로 쉽게 한계가 왔고 1년이라는 기간이 정해져 있으니 마음의 여유는 금세 무너졌다.


 결혼하고 3개월. 한창 신혼의 재미로 깨를 볶을 때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남편은 수험생이 되고 나는 수험생의 보호자가 되었다. 퇴근 후 고단한 몸과 마음으로 다시 공부를 할 수 있게 웬만한 집안일은 내가 도맡아 했고, 둘이 함께 가야 하는 일이나 행사도 나 혼자 참여했다. 나이 먹어 시작한 공부이기에 떨어지는 자존감 지킴이 역할은 물론 든든히 먹고 건강 챙기라며 식사도 열심히 챙겨야 했다. 1년이라는 기간을 정한 건 나였으니 바쁜 남편을 쉽게 원망하거나 서운해 할 수도 없었다.


 남편은 8개월 동안 최선을 다했고 9월에 이른 합격 소식을 받아냈다. 함께 고생한 시간들이 지나가며 손을 부둥켜 잡았고 또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길을 잘 헤쳐갈 수 있을 거라며 서로를 다독였다.





남편의 연구실 책상



 박사과정 5년 6개월. 박사 후 과정 1년 11개월.


 우리가 계획한 8년의 시간을 조금 다 못 채우고 남편은 마침내 학생 딱지표를 뗄 수 있었다. 늦은 나이에 공부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고달팠다. 조카뻘 되는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과 경쟁하며 이런저런 시험과 논문에 체력과 성과면에서 치여야 했다.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윤택한 삶을 꾸리는 또래들을 볼 때면 통장이 텅장이 되어가는 지라 심적인 압박도 상당했다. 나 역시 혼자서 집안일과 육아에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강산이 바뀌어도 놀랍지 않은 유학생활 동안 즐겁고 기쁜 순간도 많았지만 대개는 '힘들다. 힘들다. 힘들다.'로 점철된 시간들이었다.


 비록 늙어서 사서 고생을 제대로 했지만 끝나고 보니 남편은 소위 '꿈을 이룬 사람'이 되었고 나는 그의 곁을 지킨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 그가 하싶은 공부를 하며 꿈을 이루기까지 그의 옆에서 함께 배우고 느낀 것들은 이 고생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보배고 열매이다. 누군가 시작하고 싶은데 시작이 늦었다는 이유로 주저한다면 말하고 싶다. 오늘이 우리에게 가장 젊은 날이라고. 확고한 목표와 의지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문을 두드리라고. 물론 두드리다 지쳐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을지라도 끊임없이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결국 열릴 것이다.


 내가 남편보다 더 늦은 나이에 문을 두드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알 수 없으니까. 그땐 남편이 나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줄 테니 큰 걱정은 없다.

 

 '여보! 이번엔 내 차례야.'


(사진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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