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영수증을 읽고 나서

나 같은 사람들이 더러 있었나 보오

by 나나스크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정신이 산란한 요즘이라고 말하지만 언제는 산란하지 않은 때가 있었나 싶은 나날이다. 비가 오다 개는 듯하여 집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동네에 있는 작은 서점. 걸어서는 30분. 마을버스를 타고는 20분. 큰 차이는 없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뭉개지는 오후였기에 버스를 타기로 선택했다.



서점은 입구부터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비 내리고 난 후 어둑한 날씨. 집에 있었으면 그저 인터넷을 떠돌며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았을 텐데. 게으름을 이기고 걸어 나와 버스를 탄 나 자신에게 작은 칭찬을 보냈다. 많은 책들이 주인장님의 손길에 따라 어지러운 듯 가지런한 듯 하지만 누가 봐도 애정 어린 손길로 자리 잡고 있었다.


책을 사시고 보고 가실 거면 커피를 한 잔 내려주신다고 한다. 방문 전 본 리뷰에서 본 커피가 책방 사장님의 서비스 인 줄은 몰랐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짧은 대답을 하고 무슨 책을 읽고 싶은지 다시 한번 책방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 홍진경 씨의 인스타 그램에서 본 "정신과영수증"이라는 책이 시선에 담겼다. 그리고 곧장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했다. 책을 사서 읽고 나니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생각한 책이 아니어서 당황스러웠다. 책 제목을 말 그대로 정신과 상담을 받고 난 후 모아 온 영수증으로 받아들였기에 어떤 사람들의 정신과 상담에 관한 글 모음이라고 생각했다.


책 마무리 즈음에 정신에게 보내는 지인들의 편지의 한 내용에서 나와 같은 생각으로 책을 구매했거나 받아들인 사람들이 곧잘 있었나 보다 싶은 구절이 있었다. 생각한 내용과 완전히 다른 책이었지만 어떤 배경지식이나 스포일러도 없이 마주했기 때문일까? 책이라는 방식이 꼭 구구절절 많은 텍스트를 전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도, 전혀 모르는 사람의 삶을 허락을 받고 (심지어 돈을 내고)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에 신선한 충격도 느꼈다.



지난 20년간 모아 온 영수증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 많은 수십만 장의 영수증에서 책에 실을 수 있는 영수증은 얼마나 적응 양이었을까? 그 영수증들을 하나씩 살피며 고르는 과정에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영수증들도 많았을까? 모든 영수증들이 기억난다면 그건 또 그대로 행운일까 저주일까? 분명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담긴 영수증들도 많았을 텐데.



나에게 영수증은 그저 쓰레기다. 한 번씩 지갑을 정리하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영수증을 버리는 것이다. 어디선가 영수증으로 사용되는 종이가 만지기만 해도 좋지 않은 발암물질이라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 글을 본 후로 '영수증 버려드릴까요?'가 반가운 사람이 되었다.


세상은 넓고 역시나 사람들은 다르다. 나에게 쓰레기인 영수증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기록이고 여정이고 책이다. 그렇다면 나에겐 그녀의 영수증 같은 기록은 없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정리를 하고 또 해도 큰 변화가 없는 서랍들. 굵직굵직한 이사를 몇 번이나 했기에 추려낼 건 다 추려냈다 생각이 드는데도 무게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은 내 회색 상자. 어쩌면 그 회색상자와 정리가 되지 않는 서랍장이 내게 그녀의 영수증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이걸 꼭 버려야만 할까? 미니멀리즘을 추구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나 자신에게 가끔씩 드는 질문이었다. 누군가는 20년 동안 영수증을 모아 책도 내고 인생을 돌아보는데 서랍 한 칸, 상자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녀에 비하면 나는 정말 대단한 미니멀리스트가 아닐까?



언제 하루 시간을 내어 내 인생의 여정도 한 번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궁상맞은 혹은 대단한 역사가 들어있는지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회색상자가 갑자기 궁금해지는 밤이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댈 수도 있었는데 책방을 다녀온 내가 참 고마운 순간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