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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스크 Dec 26. 2022

진 할머니의 쿠킹 클래스

유학생 아내의 사교생활

 남편의 출근이 시작되고 나의 일상은 몹시 단조로워졌다. 에반스톤의 계절은 겨울. 우리나라도 3월이면 아직 춥지만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새 학기의 기대로 봄의 기운이 도는 듯하다. 하지만 이곳의 3월은 겨울이 이제 막 시작한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남편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웅하고 나면 몇 가지 집안일을 해야 하는 것 말고 딱히 일이 없었다. 해방감 혹은 지루함. 처음 며칠은 좋았다. 늘어져라 자고 일어나 아무것도 안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알람 소리에 놀라듯이 깨어나 지옥철을 타고 출근해야 할 일도, 마감까지 미루고 미루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후다다닥 해치울 일도. 처음에는 이게 행복인가 싶었다가 무료한 일상은 얼마 안 가 심심한 지옥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남편의 학교에는 가족의 학업을 위해 따라온 배우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잘 마련되어 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지 2주. 학교와 가까운 곳에 있는 한 호텔의 커피숍에서 매주 수요일 아침 10시에 만나 커피를 마시는 모임이 있었다. 때는 아직 추운 겨울. 많지 않은 몇몇 고인 물 아내들에게 나는 새로운 멤버로 (혹은 먹잇감?) 환영을 받았고 곧 여기저기 모임에 불려 가게 되었다. 








  많은 모임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쿠킹클래스였다.  Jeanne이라는 할머니께서 학교에 찾아오는 수많은 외국인 학생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본인의 집에서 미국음식과 문화를 알려주고, 외국인들끼리 소통의 장을 열어주고자 만든 봉사 프로그램이었다. N 대학교 유학생 와이프들이라면 한 번쯤 할머니의 수업을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업의 인기도 좋았고 퀄리티는 말할 것도 없었다.


Jeanne 에게서 온 클래스 예약 확인 메일

 


 할머니 수업에 비하면 죄송스러울 만큼 작은 수업료를 낸다. 할머니께서 직접 요리하시고 시시각각 할머니의 주문에 따라 우리 중 누군가가 잔심부름을 하고 만든 음식들은 함께 점심으로 먹으며 수다를 떤다. 시간은 12시 30분에 끝난다고 적혀있지만 메일 속 시간안내 란 괄호 안의 '?'처럼 한 번도 그 시간에 끝난 적은 없다. 우리들의 사교생활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베테랑의 솜씨로 처음 온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자기를 소개할 수 있게 이끌어주시고 적절한 질문을 해주셨다. 처음이라 어색할 수 있는 만남에 이렇듯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헬퍼가 있어 열심히 대답을 하고 질문도 할 수 있는 용기가 샘솟았다.




다함께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던 공간


 

 쿠킹클래스가 좋은 점은 할머니의 집 때문이기도 했다. 응접실은 보기만 해도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할머니가 아끼고 애지중지하는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할머니께서 젊었을 때의 사진부터 아이들의 사진, 그리고 그 사진 속의 어린이들이 다 커서 또 어린이들과 함께 해 있는 사진들까지. 할머니의 나이만큼이나 이 집도 할머니와 함께 나이를 먹었고 많은 추억들이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오래된 집이지만 낡았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포근하고 아늑하고 예쁘다. 할머니의 공간은 정말 '예쁘다'는 말로 설명되었다. 함께 요리를 만들고 그 예쁜 응접실에 다 같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먹는 점심이 즐거웠다. 자신이 사랑으로 만든 공간을 예쁜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들을 할머니께서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봐주셨다. 그 눈빛에서 집에 대한 할머니의 자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요리중이신 할머니의 손 / 점심식사 전 준비된 모습

 

 할머니 덕분에 귀한 레시피도 많이 얻었다. 할머니가 젊었을 적부터 사용한 너덜너덜한 요리책에서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주셨다. 요리책이라니 왠지 더 근사하고 귀한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의 백발과 오래된 요리책, 그리고 할머니의 손끝. 유튜브 요리 영상이 낯설어지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할머니 덕분에 베이킹도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한 번쯤은 배워보고 싶었지만 집에 오븐이 없어 실행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부엌에는 가정집인데도 불구하고 커다란 컨벤션 오븐이 2대나 있었다. 6남매를 키워내는 동안 얼마나 자주 이 오븐들이 돌아갔을까? 할머니의 손맛에 다 이유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쿠키들

 

 마침 어제가 크리스마스였어서 생각나는 날이 크리스마스 쿠키를 구웠던 날이다.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관광지는 말할 것도 없고 골목 구석구석, 마켓, 백화점 등등 모두 크리스마스 장식에 열을 올린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활동 중 하나가 크리스마스 쿠키 굽기이다.


 이날은 크리스마스 쿠키뿐만 아니라 정말 다양한 쿠키를 만들었다. 크리스마스 쿠키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나라의 이색 쿠키들도 만들었다. 수업의 하이라이트는 크리스마스 쿠키 꾸미기였다. 없는 게 없는 할머니의 찬장에서 쿠키 장식들이 잔뜩 쏟아져 나왔다.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문화를 받아들인 입장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식의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생소하고 재미있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나라에서 만드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쿠키라니 뭔가 더 의미 있었다. 각자 예쁘게 쿠키를 장식하고 집에 가져갈 만큼 나눠 담은 후 쿠키를 시식했다. 맛도 모양도 모두 다양하고 처음 먹어보는 맛에 놀라고 재미있었다.  입도 마음도 풍요로운 첫 번째 크리스마스였다.



    





 할머니의 쿠킹클래스는 단순히 음식을 배우는 곳이 아니었다. 음식을 배우는 건 덤으로 따라오는 보너스 같은 것이었고 실상은 우리의 사랑방이었다. 낯선 나라에 와서 느끼는 따듯함은 몇 배나 더 따듯하게 느껴졌고 어려운 시작을 매끄럽게 도와주는 완충제 같은 곳이었다. 할머니 또한 자식들이 다 떠나고 홀로 남은 집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새로운 만남과 온기로 그 공간들을 채우고 계셨다. 우리와 함께 한 시간이 할머니께도 좋은 위안과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코로나가 시작된 후에 할머니의 쿠킹클래스가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 세계가 유례없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그 시기를 잘 이겨내셨기를 바랐다. 조만간 할머니의 사랑방이 다시 열리길 희망한다. 할머니가 예쁜 집에서 오래오래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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